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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1일 (목) 12:22 판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년 경기도 ~ 1898년)의 아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이고, 당호(堂號)는 명미당(明美堂)이며, 조선 제2대왕 정종대왕(定宗)의 열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의 15대 후손으로 병인양요(고종 3년, 1866) 때 순국한 전(前) 개성부유수·이조판서 충정공(忠貞公) 사기 이시원고종 3년(1866)에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강화도가 함락되자 주민들 모두가 피신하는 것을 개탄하고, 신하로서 도망갈 수는 없다면서 유소(遺疏)를 올리고 순국하여 주민들의 의식을 깨운 의사(義士)이다. 이때 아우 이지원(李止遠)도 함께 순국했다. 저서로 《사기집(沙磯集)》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沙磯 李是遠)의 손자이다. 공(公)은 조선후기의 문신, 대문장가(麗韓九大家)이며, 교육자·양명학자·사상가·민족보수주의자이고 강화학파의 계승자이며, 구한말시대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明美堂集)》과 《당의통략* 정치역사 연대기(黨議通略)》등이 있으며,〈전가추석 (田家秋夕:농가의 추석)충청우도 암행어사 시절 목도한 농가의 참상을 표현함, 고종 13년(1876)〉·〈도망 (悼亡:아내를 애도)(妻 喪)〉시는 일반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공(公)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통해 조선후기 사회 당쟁의 폐단을 지적한 몇 안되는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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