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격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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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며 노래한다는 뜻으로, 태평한 세월을 즐김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요(堯)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며 노래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1]
격양가 이야기가 실린 가장 이른 현존 문헌은 후한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이다. 〈예증(藝增)〉 편은 《논어》의 “크도다, 요의 임금 됨이여! 넓고 넓어 백성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구나”를 든 뒤 이렇게 인용한다.[5]
傳曰:「有年五十擊壤於路者,觀者曰:大哉,堯德乎!擊壤者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堯何等力!」
“전하는 말에, 쉰 살 된 사람이 길에서 땅을 치고 있었는데, 구경하던 사람이 ‘크도다, 요임금의 덕이여!’라고 하자 땅을 치던 사람이 말했다. ‘나는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며,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을 뿐이니, 요임금이 무슨 힘을 썼단 말이오!’”
왕충은 이 이야기를 ‘민무능명(民無能名)’의 증거로 드는 것이 과장이라고 비판했다. 구경꾼은 요임금의 덕을 알았으니 백성이 모두 몰랐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는 〈감허(感虛)〉와 〈수송(須頌)〉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길(路)’이 ‘길바닥(塗)’으로 되어 있다.[6]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고사를 “한 노인이 …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태평성대를 즐겼다”고 풀었으나,[1] 원문에서 요임금의 덕을 찬양한 것은 구경꾼이고, 노인은 오히려 임금의 힘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다. 임금의 덕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편안하다는 데 이 노래의 뜻이 있다.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이 지은 《제왕세기(帝王世紀)》는 지금 전하지 않지만, 여러 유서에 인용되어 남아 있다. 《태평어람》 권80이 인용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7]
天下大和,百姓無事。有八十老人擊壤歌于道,觀者嘆曰:「大哉,帝之德也!」老人曰:「吾日出而作,日入而息,鑿井而飲,耕田而食,帝何力有于我哉!」
나이가 ‘쉰’에서 ‘여든’으로 바뀌고, 끝 구도 ‘요임금이 무슨 힘을 썼나’에서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로 바뀌었다. 송나라 곽무천(郭茂倩)의 《악부시집(樂府詩集)》 권83은 같은 《제왕세기》를 “여든이나 아흔 살 된 노인(八九十老人)”, “帝何力於我哉”로 인용한다.[8]
‘배를 두드린다(鼓腹)’는 표현은 본래 《장자(莊子)》 〈마제(馬蹄)〉에서 옛 혁서씨(赫胥氏) 시대의 백성을 “음식을 입에 물고 즐거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노닐었다(含哺而熙,鼓腹而遊)”고 한 데서 왔다.[9] 요임금 이야기와는 따로 있던 말이다.
원나라 증선지(曾先之)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요임금이 강구(康衢)에서 아이들의 노래를 듣는 《열자》의 이야기와 격양가를 한데 이어, “노인이 음식을 입에 물고 배를 두드리며 땅을 치면서 노래했다(有老人含哺鼓腹,擊壤而歌)”고 하고 노래 끝 구를 “帝力何有於我哉”로 적었다.[10] ‘고복’과 ‘격양’이 한 장면에 놓인 것은 이 책에서 굳어졌으며, 《디지털 대사천》도 고복격양을 《십팔사략》 등에 보이는 고사로 설명한다.[11] 강구요와 격양가가 문헌마다 어떻게 다른지는 강구연월 문서의 대조표에 정리했다.
네 글자로 붙여 쓴 예는 《십팔사략》보다 훨씬 이르다. 남조 양나라 왕승유(王僧孺)는 〈위위옹주치사표(爲韋雍州致仕表)〉에서 물러나 쉬게 해 달라고 청하며 “땅 치고 배 두드리며 지내게 해 주신다면 그 은혜가 오히려 크다(擊壤鼓腹,其賜猶多)”고 했다.[12] 수나라 말 조군언(祖君彦)이 이밀(李密)을 위해 지은 격문(617)은 옛 성왕의 다스림 아래 “모두가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며 우물 파고 밭을 갈았다(莫不鼓腹擊壤,鑿井耕田)”고 했다.[13] 《성어전》은 ‘擊壤鼓腹’의 용례로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여배훈서(與裴塤書)〉를 든다.[3]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사가재기(四可齋記)〉에서 언젠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태평한 시절의 농부가 되어 땅을 치고 배를 두드리며 임금의 교화를 노래하겠다(作大平農叟。擊壤鼓腹。歌詠聖化)”고 했다.[14] 조선에서는 《십팔사략》을 늘린 《십구사략(十九史略)》으로 이 대목을 익혔고, 문집과 상소에 태평을 기리는 상투어로 자주 썼다.
- 이만수(李晩秀)의 〈함포고복격양실기(含哺鼓腹擊壤室記)〉에 따르면, 일곱 살 된 동궁이 서연에서 《십구사략》 〈제요기(帝堯紀)〉를 강독한 뒤 네 폭의 글씨를 써서 내렸고, 그중 “含哺鼓腹擊壤” 여섯 자를 받은 빈객 서영보(徐榮輔)는 이를 서재 편액으로 걸었다.[19]
- 1837년(헌종 3) 4월 5일, 헌종은 입시한 신하들에게 “함포고복하며 땅을 치고 노래하다(含哺鼓腹擊壤而歌)”를 제목으로 부(賦)를 지어 쓰게 했다.[20]
-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鼓腹擊壤’과 ‘擊壤鼓腹’이 한 건도 없고, 《승정원일기》에는 ‘鼓腹擊壤’이 2건 있다.[21]
- 풍년이 들자 마을 사람들은 고복격양하며 잔치를 열었다.
- 대형 장애 없이 한 해를 넘긴 운영팀은 오랜만에 고복격양의 연말을 보냈다.
- ↑ 1.0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고복격양”,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3%A0%EB%B3%B5%EA%B2%A9%EC%96%91, 확인날짜=2026-10-03.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격양가”,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2%A9%EC%96%91%EA%B0%80, 확인날짜=2026-10-03.
- ↑ 3.0 3.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擊壤鼓腹”,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20096, 확인날짜=2026-10-03.
- ↑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撃壌”,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92%83%E5%A3%8C, 확인날짜=2026-10-03.
- ↑ 왕충(王充), 《논형(論衡)》 〈예증(藝增)〉.
- ↑ 왕충(王充), 《논형(論衡)》 〈감허(感虛)〉·〈수송(須頌)〉.
- ↑ 이방(李昉) 등, 《태평어람(太平御覽)》 권80 〈황왕부(皇王部) 5·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에 인용된 황보밀(皇甫謐) 《제왕세기(帝王世紀)》.
- ↑ 곽무천(郭茂倩), 《악부시집(樂府詩集)》 권83 〈잡가요사(雜歌謠辭) 1·격양가(擊壤歌)〉.
- ↑ 《장자(莊子)》 〈마제(馬蹄)〉.
- ↑ 증선지(曾先之), 《십팔사략(十八史略)》 권1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
- ↑ 11.0 11.1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鼓腹撃壌”,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9%BC%93%E8%85%B9%E6%92%83%E5%A3%8C, 확인날짜=2026-10-03.
- ↑ 왕승유(王僧孺), 〈위위옹주치사표(爲韋雍州致仕表)〉, 《예문유취(藝文類聚)》 권18 인용.
- ↑ 조군언(祖君彦), 〈위이밀격낙주문(為李密檄洛州文)〉, 《전당문(全唐文)》 권132.
- ↑ 이규보(李奎報), 〈사가재기(四可齋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04A_0250_010_0030, 확인날짜=2026-10-03.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含哺鼓腹”,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1868, 확인날짜=2026-10-03.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擊壤歌”,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7998, 확인날짜=2026-10-03.
- ↑ 참고: “『鼓腹撃壌』書き下し文・わかりやすい現代語訳と文法解説”, 마나페디아(マナペディア), https://manapedia.jp/text/1995, 확인날짜=2026-10-03.
- ↑ 참고: “鼓腹撃壌 十八史略 : 教科書 和訳 現代語訳”, 신신 제미널(新進ゼミ), https://shinshin-seminal.blog.jp/archives/13169861.html, 확인날짜=2026-10-03.
- ↑ 이만수(李晩秀), 〈함포고복격양실기(含哺鼓腹擊壤室記)〉, 《극원유고(屐園遺稿)》,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585A_0020_020_0110, 확인날짜=2026-10-03.
-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헌종 3년 4월 5일 임자, https://sjw.history.go.kr/id/SJW-I03040050-02000, 확인날짜=2026-10-03.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鼓腹擊壤”·“擊壤鼓腹”, https://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검색 “鼓腹擊壤”, https://sjw.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