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고토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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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고토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
출생 | 1646년 7월 1일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 |
사망 | 1716년 11월 14일 (70세) |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 |
직업 | 학자, 사서, 외교관, 법률가, 발명가 |
분야 | 수학, 물리학, 지질학, 의학, 생물학, 수의학, 고생물학, 심리학, 공학, 언어학, 사회학, 형이상학, 윤리학, 경제학, 문헌정보학, 역사학, 정치학, 신학, 철학, 미래학 |
학력 | 알테 니콜라이슐레 (졸업, 1655~61)
라이프치히 대학교 (철학 / B.Sc., 1661~62)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M.Sc., 1662~64)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법학 / M.Sc., 1664~65)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P.hD., 1665~66) 알트도르프 대학교 대학원 (법학 / P.hD., 1666) |
종교 | 개신교(루터회) |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독일의 수학자, 물리학자, 판사, 외교관, 사서, 공학자, 철학자, 사상가이다. 라이프니츠는 수학, 물리학, 철학, 공학, 의학, 정치학, 지질학, 심리학, 도서관학 등 자신이 흥미를 가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일반적인 사람은 특정한 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뛰어난 것이 대부분이지만 라이프니츠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던 완성형 천재로 박식가(Polymath)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아이작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을 창시했고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필수요소인 이진법을 개발하였다. 디지털 컴퓨터 탄생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컴퓨터 개발을 시도한 선지자 중 하나였으며 물리학에서 동역학을 고안했다. 지질학과 관련해 지구 안에는 액체상태의 내핵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고 신비주의적인 중세의학이 철저한 실험과 교차검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사서 생활 중 도서 분류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프로펠러, 물 펌프, 채광기계, 증기기관, 바닷물 담수화 이론 등을 개발하는 등 응용공학에서도 다양한 발명을 해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국민보험과 세금개혁을 제안했고 유럽연합의 탄생을 300년 전에 예견했으며 인터넷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또한 초기 게임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가 해낸 발견들 중 다수는 시대 및 언어적 문제로 인해 당시 살아있던 대부분의 인류에게 알려지지 못했고 매우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기록이 발견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신성 로마 제국 라이프치히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학문적 성취가 독보적이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면 불과 초등학생 나이에 라틴어와 희랍어를 통달하다시피 했고, 모든 과목에서 완성형의 능력을 보였다. 이미 어릴때부터 천재로서 유명해서, 살던 지역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을 정도. 고작 15살이었던 166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1663년에는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다.
1666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신청했으나 나이가 어려 거절당하고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 그를 위해 마련한 교수직을 사양하고, 뉘른베르크의 연금술 사회의 비서직으로 일했다. 이것이 그의 첫 직업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마인츠의 정치인 보이네부르크를 만나 법률고문이 되었다. 이후 항소법원의 배석판사로 승진하여 외교활동을 하였다.
1676년, 브라운슈바이크 공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초청되어, 하노버의 궁중고문, 도서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가 곧 하노버 공가를 쭉 섬겼다. 족보연구를 통해 하노버공이 선제후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하노버공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가 되면서 라이프니츠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조지 1세가 영국에 데려갈 수가 없었던 것.
학문적 업적[편집 | 원본 편집]
수학[편집 | 원본 편집]
미적분학[편집 | 원본 편집]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에 미적분 이론을 발명한 것.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개발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설은 포도주를 숙성하는 오크통의 부피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서로 누가 미적분을 먼저 발명했는가에 대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뉴턴이 1666년쯤 미적분을 발명했고, 라이프니츠의 발명 시점은 1675년이다. 1675년 라이프니츠는 미분의 기호 d와 적분의 기호 ∫를 고안하여 미적분학 문제들을 풀어내었고 이들을 자신의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라이프니츠는 1676년 10월 런던을 방문하여 수학자 존 콜린스(John Collins)와 서로의 연구를 공유하며 여러 수학적 논의를 나눈다. 그때 라이프니츠는 콜린스로부터 뉴턴이 1669년 작성한 논문,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를 받아보게 된다. 이 논문은 유율법을 담고 있으며 출판되지 않은 채로 영국의 수학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논문이었다. 다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논문을 봤던 시점에는 이미 라이프니츠가 자체적으로 미적분학을 완성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뉴턴의 논문이 큰 참고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된다. 시간이 흐르고 뉴턴이 발표를 미루고 있을 때 적극적인 성격의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을 정리하여 1684년 독일 학회에 발표한다. 그 후 뉴턴은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미적분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세계 과학을 주름잡는다고 생각했던 영국 학회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이론을 베꼈다고 독일 학회에 항의하였다.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출판전 논문과 편지를 읽어보았다는 사실을 문제삼은 것이다. 영국 학회의 맹렬한 항의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뉴턴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영국 왕립학회의 과학자들에게 라이프니츠의 표절 여부를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설과, 뉴턴 밑의 제자들이 영국 학회가 독일 학회에 이의를 제기하라고 자진하여 촉구했다는 설이다. 다만 평소 뉴턴의 권위적이고 괴팍한 성격 때문인지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쪽은 전자이다. 결국 나중에 국제 분쟁에서는 영국과 독일의 과학자들 사이의 힘겨루기처럼 커졌는데, 이것이 단순히 누가 이론을 발명했는지 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닌 어느 국가가 과학의 선두 주자인가에 초점을 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독일 선제후 조지 1세가 영국 왕이 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미적분학은 뉴턴이 먼저 생각해냈지만 둘 다 독자적으로 발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수학적 완성도는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뉴턴은 수학자이기 이전에 물리학자라서 고전 역학을 정리하는데 편리하도록 미적분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평균변화율의 극한으로 순간변화율, 즉 미분계수를 정의하는 등 뉴턴보다 엄밀한 방식으로 미적분을 고안하고 정리했다. 현재 전 세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미적분의 기호나 이론은 모두 수학적으로 더 엄밀한 라이프니츠의 체계이다.
그리고 교육적 편의성에서도 뉴턴은 라이프니츠에게 뒤쳐졌다. 당시 뉴턴이 만든 미적분의 기호는 오직 뉴턴만 알 수 있는 복잡한 식이었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논문은 '하나의 변수를 다른 변수에 대해 미분한 값'을 어떤 기호로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변수에 대한 함수란 건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적분기호를 실제 쓸 때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 사람들이 논리적 흐름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기술되었다. dy/dx라는 적합한 기호의 틀들을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면서 연구를 진행하여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이해를 시키기도 하고 인정을 받았으나, 뉴턴은 그냥 미분을 ẏ처럼 위에 점 하나 달랑 찍어서 표현하는 등 미적분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기호와 틀의 보편성, 천재 아닌 사람도 쉽게 이해할 만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또한 뉴턴의 성격 자체가 너무 내성적이라 일일이 학자들이 미적분에 대해 궁금해하는 편지를 보내도 아무런 답장이나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뉴턴식 미분 표기는 별로 쓰이지 않고, 뉴턴 본인이 만든 고전역학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을 표현할 때나 쓰인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미적분학에 묻혀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고안하였고, 이를 토대로 최초의 기계식 사칙연산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전산학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기도 한 셈.
논리학[편집 | 원본 편집]
또한 라이프니츠는 현대논리학의 창시자가 될 뻔했다. 그는 수학에서 기호들을 통해 명제들을 나타내고 증명을 하듯이 애매성과 모호성이 제거되고 인간의 사유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 모든 학문에서 쓸 수 있는 보편언어(인공언어)의 구성을 계획했고 심지어 200여년 뒤에야 나온 논리학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이미 제기했다. 사실상 미적분과 더불어 라이프니츠의 가장 큰 업적.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출판되지 않고 책상 서랍 속에 처박혀 수백 년이 지나서야 발견된다. 만약 그의 논리학에 대한 작업들이 온전히 출판되어 학계에 알려졌다면 논리학의 혁명은 200년쯤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현대 컴퓨터 이론의 시초인 셈.
양상 논리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을 최초로 철학에 도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창조했으며, 이에 대한 논의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이 생겨났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든 진리를 수학 법칙처럼 무조건 참이 되는 필연적 진리와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우연적 진리로 나누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에 의해 모두 최상의 완전함이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우연적 진리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 필연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물리학[편집 | 원본 편집]
뉴턴이 주장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비합리적이며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절대공간에 대한 비판은 훗날 에른스트 마흐의 주장과 비슷한 면이 있다. 뉴턴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봤다는 점에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예측을 남들보다 더 빨리 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힘을 근원력과 파생력으로 나누었는데, 근원력은 단자의 목적이고, 파생력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 파생력이 우리가 흔히 느끼는 힘이며, 코나투스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철학[편집 | 원본 편집]
철학자로서 중요한 업적은 단자론(모나드론, monad論)이다. 단자론의 주요 내용은 먼저 근본이 되는 실체인 단자(모나드)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이 단자들 중에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인식의 원리를 규명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모나드론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부분이 없는 극도로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들의 결합체이다. 마치 원자와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원자와는 다르게 개별 모나드들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한 완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상태, 즉 지각과 욕구를 가진다. 지각은 모나드의 일시적인 상태고, 욕구는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는 내부적인 힘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모나드는 물질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 실체이다. 우리가 보는 물질적 세계는 모나드들이 보는 현상일 뿐이다.
계속해서 모나드론에 따르면 각 모나드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 조화된다. 경험적으로 보이는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물질세계는 사실 관념이지만, 모나드들의 관념은 모두 조화되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해도 별 상관없다. 즉, 모나드들은 자발적이라 인과관계나 상호작용 같은 건 없지만, 신에 의해 서로서로 맞아 떨어지게 조정되어 있으므로 일상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신학[편집 | 원본 편집]
신학자로서의 주요 업적은 변신론에 관해서 인데, 이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고 악한 존재로 만들었냐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 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에 있어서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이다.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볼테르가 라이프니츠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낙관주의를 디스하기 위해서 쓴 소설이 다름 아닌 캉디드.
인터넷에 대한 아이디어 제시[편집 | 원본 편집]
또한 학문의 발전을 위한 방법으로서 전 유럽이 공유하는 경험적 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제시했으며, 이에 따른 부차적 효과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단결 또한 기대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 도구로써 라이프니츠는 세계 최초로 인공어와 컴퓨터의 개념을 떠올렸다. 단순히 말만 한 게 아니라 그는 실제로 'Stepped Reckoner'라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20세기에 인공어, 컴퓨터가 실제로 등장했음은 물론이요 인터넷의 발명으로 전세계가 공유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무려 300년이나 앞서갔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