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서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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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서답(東問西答)은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뜻하는 한자성어이다. 어순을 바꾼 ‘문동답서(問東答西)’도 같은 뜻이다.[1][2]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답한다’는 말로,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하게 답하는 경우와, 곤란한 질문을 피하려고 일부러 딴소리를 하는 경우를 모두 가리킨다. 회의·인터뷰·청문회에서 핵심을 비껴가는 답변을 비판할 때 자주 쓴다.
한문 문법으로는 동사가 앞에 오는 ‘문동답서(問東答西)’가 자연스럽고, 실제로 중국과 조선의 옛 문헌에서도 이 형태가 훨씬 많이 쓰였다.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동문서답’이 표준적인 형태로 굳었고, 현대 중국어에서는 같은 뜻으로 ‘답비소문(答非所問)’을 흔히 쓴다.[3]
특정한 고사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다만 두 형태 모두 한국보다 먼저 중국 불교 문헌에 보인다.
당나라 승려 일행(一行)이 풀이한 《대비로자나성불경소(大毘盧遮那成佛經疏)》(《대일경소》) 권18에는 보살이 버려야 할 삿된 마음을 설명하며 “동쪽을 물으면 서쪽을 답하고, 서쪽을 물으면 동쪽을 말하는 것(問東答西、問西云東者也)”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는 굽고 아첨하는 마음, 곧 정직하지 못하게 말을 돌리는 태도를 가리킨다.[4]
송나라 이후에는 선종 문헌과 유학자의 어록에서 자주 쓰였다. 《벽암록(碧巖錄)》 권2 제12칙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동산(洞山)이 “마 세 근(麻三斤)”이라고 답한 공안을 두고, 사람들이 “동산이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답했다(洞山問東答西)”고 오해한다고 적었다.[5] 주희는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4에서 예학으로 이름난 어떤 이를 두고 “일을 모르고 동쪽을 물으면 서쪽을 답하니 알아들을 수가 없다(不曉事,問東答西,不可曉)”고 평했다.[6]
‘東問西答’이라는 네 글자도 송나라 선종 문헌에 이미 있다. 북송의 황룡조심(黃龍祖心, 1025~1100)은 상당 법어에서 “내가 한 가닥 길을 열어 주면 너희가 동문서답하는 대로 내버려 두겠지만, 한 가닥 길도 열어 주지 않으면 너희는 또 어디를 더듬겠느냐(我若放一線道,從尒東問西答;不放一線道,爾又向甚處捫摸)”라고 했다.[7]
원오극근(圜悟克勤)이 1125년 무렵 펴낸 《벽암록》 권3 제30칙에는 조주(趙州)의 공안이 실려 있다. 한 승려가 “스님께서 남전(南泉)을 직접 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묻자 조주는 “진주(鎭州)에서는 큰 무가 난다(鎭州出大蘿蔔頭)”라고 답했다. 원오는 이를 두고 “강서의 징 산성(澄散聖)은 이를 동문서답이라 판정하고 대답하지 않은 말이라 불렀다(江西澄散聖判,謂之東問西答,喚作不答話)”고 소개한 뒤, 그렇게 이해해서는 조주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했다.[8] 선종에서 동떨어진 대답은 오히려 분별을 끊는 방편이었으므로, ‘동문서답’은 처음부터 그런 대답을 겉으로만 읽는 태도를 경계하는 문맥에 놓여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오랫동안 ‘問東答西’ 형태가 쓰였다. 원문 기준으로 ‘問東答西’는 13건, ‘東問西答’은 1건이다.
- 세조 13년(1467) 5월, 건주위 여진 정벌을 앞두고 세조는 공격이 어렵다고 아뢴 이극균(李克均)에게 “너는 어찌 임금의 뜻과 조정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답하느냐(汝何不知主意與廟算,問東答西也)”라고 꾸짖었다. 실록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예이다.[9]
- 효종 1년(1650) 효종은 유계(兪棨)의 옛 상소 원본을 찾아오라 했으나 승정원이 일기에 옮겨 적은 것만 올리며 경위를 얼버무리자 “동문서답하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매우 부족하다(問東答西,殊欠事君之道矣)”고 했다.[10]
- 정조 10년(1786) 정조는 채제공 문제로 엉뚱한 옛일을 끌어온 대사헌 유언호(兪彦鎬)에게 “경의 말은 동문서답이라 할 만하다(可謂問東答西)”며 파직했다.[11]
‘東問西答’ 형태가 실록에 나오는 것은 숙종 44년(1718) 2월 29일 기사 한 건뿐이다. 전라도 유생 이승운(李升運) 등은 송시열·송준길의 문묘 종사에 반대하는 상서에서, 효종이 북벌의 큰 계책을 은밀히 묻자 송시열이 도리어 오현(五賢) 종사의 취사, 강빈 옥사와 김홍욱의 억울한 죽음 같은 이야기로 “동문서답하여(東問西答) 어진 신하에게 겸허히 묻고자 한 임금의 뜻을 저버렸다”고 공격했다.[12] 이에 김민택(金民澤)은 다른 유생들을 대신해 쓴 변무서에서 이승운 등이 ‘동문서답’을 송시열을 모욕하는 구실로 삼았다고 반박했다.[13] 《승정원일기》에서도 ‘問東答西’는 인조 대부터 70여 건이 보이는 데 비해 ‘東問西答’은 고종 23년(1886) 기사 등 드물게 보인다.[14]
나무위키 등에는 ‘동문서답’이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고 《숙종실록》 숙종 44년 기사에 처음 나온다는 설명이 보이지만, 같은 네 글자가 이미 북송 황룡조심의 어록과 《벽암록》에 나오고, 한국에서도 세조 13년(1467)부터 ‘問東答西’ 형태로 쓰였다. 숙종 44년 기사는 실록에서 ‘東問西答’ 형태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나오는 기사일 뿐이다.
| 한자 | 음 | 기본 의미 | 성어 안의 의미 |
|---|---|---|---|
| 東 | 동 | 동녘 | 동쪽, 이쪽 |
| 問 | 문 | 묻다 | 묻다 |
| 西 | 서 | 서녘 | 서쪽, 저쪽 |
| 答 | 답 | 대답하다 | 대답하다 |
- 중국어: ‘답비소문(答非所問)’이 가장 흔하고, ‘문동답서(問東答西)’도 쓴다.
- 영어: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이나 추론을 ‘non sequitur’라고 한다. 질문을 피해 딴 이야기를 하는 것은 ‘evasive answer’, ‘dodging the question’이라고 한다.
- 장애 원인을 물었는데 담당자는 모니터링 도구 자랑만 늘어놓아 동문서답이 되고 말았다.
- 개인정보 유출 경위를 묻는 질의에 회사 측이 보안 투자 계획만 되풀이하자 동문서답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워지신 뒤로 자주 동문서답을 하신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동문서답”,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F%99%EB%AC%B8%EC%84%9C%EB%8B%B5, 확인날짜=2026-09-27.
-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문동답서”, https://open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focus_name=query&query=%EB%AC%B8%EB%8F%99%EB%8B%B5%EC%84%9C, 확인날짜=2026-09-27.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答非所問”,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1260, 확인날짜=2026-09-27.
- ↑ 일행(一行), 《대비로자나성불경소(大毘盧遮那成佛經疏)》 권18, 대정신수대장경 T1796, CBETA, https://cbetaonline.dila.edu.tw/zh/T1796_018, 확인날짜=2026-09-27.
- ↑ 중현(重顯) 송고·극근(克勤) 평창, 《불과원오선사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巖錄)》 권2, 대정신수대장경 T2003, CBETA, https://cbetaonline.dila.edu.tw/zh/T2003_002, 확인날짜=2026-09-27.
-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4.
- ↑ 《보각조심선사어록(寶覺祖心禪師語錄)》(《황룡사가록》 제2), 만속장 X1343, CBETA, https://cbetaonline.dila.edu.tw/zh/X1343_001, 확인날짜=2026-09-27.
- ↑ 중현 송고·극근 평창,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3 제30칙, 대정신수대장경 T2003, CBETA, https://cbetaonline.dila.edu.tw/zh/T2003_003,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5월 5일 기사(己巳)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ga_11305005_001,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4월 13일 병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qa_10104013_001,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0월 11일 신해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va_11010011_002,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 2월 29일 무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sa_14402029_001, 확인날짜=2026-09-27.
- ↑ 김민택, 〈대오도유생유언협등변선정피무서(代五道儒生兪彥協等辨先正被誣書)〉, 《죽헌집(竹軒集)》 권2,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985A_0030_010_0020,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검색 “問東答西”·“東問西答”, https://sjw.history.go.kr/, 확인날짜=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