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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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Révolution française, French Revolution)은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나 절대 왕정과 신분제 사회인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무너뜨리고, 입헌 군주정과 공화정, 공포 정치, 총재 정부를 거쳐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으로 마무리된 정치·사회 변혁이다. 한국에서는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다른 혁명과 구분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도 부른다.
혁명은 국가 재정 파탄을 해결하려고 1789년 5월 소집한 삼부회에서 시작되었다. 제3신분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선언했고, 7월 14일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를 함락했으며, 국민의회는 8월에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1792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며 이듬해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 대외 전쟁과 내전 속에서 1793~1794년 공안위원회가 공포 정치를 폈고,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들어선 총재 정부는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무너졌다.[1][2]
혁명이 내건 국민 주권, 법 앞의 평등, 인권의 원칙은 자유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회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고, 혁명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져 유럽 질서를 바꿨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흔히 근대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반면 9월 학살, 공포 정치, 방데 전쟁의 대량 학살처럼 혁명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도 커서, 혁명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다.[1]
프랑스와 서구에서 수식어 없이 '프랑스 혁명'이라 하면 1789년의 혁명을 가리키고,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유럽 혁명) 등은 따로 부른다.
혁명의 시작과 끝을 언제로 볼지는 학자마다 다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명사회가 소집되고 귀족이 왕권에 맞선 1787년부터 1799년까지로 잡는다.[1] 1789년 5월 삼부회 개회를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가장 흔하며, 끝은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급진 혁명이 끝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
루이 14세 이후 거듭된 전쟁으로 쌓인 빚은 미국 독립 전쟁 참전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루이 16세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도와 영국에 타격을 주었지만, 전비를 빌려 마련하는 바람에 정부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4]
재무총감 칼론은 1787년 특권 신분에도 세금을 물리는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왕이 특별히 소집한 명사회가 이를 거부했고 고등법원(파를망)도 반대했다. 고등법원과 귀족들은 새 세금은 전국 신분회인 삼부회만 승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1788년 여름 이듬해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4] 삼부회는 1614년 이후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5]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가 재정난의 원인으로 지목되곤 했으나, 브리태니커는 왕비의 궁정 지출은 국가 부채에 작은 몫을 보탰을 뿐이라고 본다.[6]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은 프랑스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널리 읽혔고, 프리메이슨 지부와 독서실 같은 모임을 통해 교육받은 계층에 퍼졌다. 왕권신수설에 대한 믿음은 약해졌고, 미국 혁명은 자유와 대표 없는 과세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였다. 여기에 1770년대부터 이어진 경제 불황 위에 1788년 여러 지방의 흉작이 겹쳐 빵값이 치솟았다. 브리태니커는 이런 요인들과 신성성을 잃은 왕정의 적응 실패를 흔히 드는 원인으로 꼽으면서도, 원인에 대한 학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인다.[1] 1785년 왕비가 추기경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누명을 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도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6]
| 날짜 | 사건 |
|---|---|
| 1789년 5월 5일 | 베르사유에서 삼부회 개회 |
| 1789년 6월 17일 | 제3신분 대표, 국민의회 선언 |
| 1789년 6월 20일 | 테니스코트 서약 |
| 1789년 7월 14일 | 바스티유 습격 |
| 1789년 8월 4~5일 | 국민의회, 봉건제 폐지 결의 |
| 1789년 8월 26일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채택 |
| 1789년 10월 5~6일 | 베르사유 행진, 왕실이 파리로 옮겨짐 |
| 1791년 6월 20~21일 | 국왕 일가의 바렌 도주와 체포 |
| 1791년 9월 3일 | 1791년 헌법 제정(입헌 군주정) |
| 1792년 4월 20일 |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 혁명 전쟁 시작 |
| 1792년 8월 10일 | 튈르리궁 습격, 왕권 정지 |
| 1792년 9월 20일 | 발미 전투 |
| 1792년 9월 21~22일 | 왕정 폐지, 공화정(제1공화국) 선포 |
| 1793년 1월 21일 | 루이 16세 처형 |
| 1793년 6월 2일 | 지롱드파 의원 체포, 산악파 집권 |
| 1793년 9월 5일 | 국민공회, "공포를 일정에 올린다"고 결의(공포 정치 시작) |
| 1793년 10월 16일 |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
| 1794년 2월 4일 | 식민지 노예제 폐지 |
| 1794년 7월 27일 | 테르미도르 9일, 로베스피에르 체포(이튿날 처형) |
| 1795년 10월 | 총재 정부 출범 |
| 1799년 11월 9~10일 |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통령 정부 수립 |
삼부회 소집이 확정되자 대표 수와 표결 방식이 쟁점이 되었다. 1788년 9월 파리 고등법원은 1614년처럼 신분별로 따로 모여 신분마다 한 표씩 행사해야 한다고 결정했는데, 이대로라면 제3신분은 늘 두 특권 신분에게 지게 되어 있었다.[3] 이 무렵 성직자 시에예스의 소책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는 제3신분이 "모든 것이다. 그러나 사슬에 묶이고 억눌린 모든 것이다"라며 특권 신분 없이도 국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8] 진정서(카이에)를 쓰게 한 선거 과정 자체가 민중을 정치화했다.[3]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열렸지만 표결 방식을 놓고 한 달 넘게 공전했다.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시에예스의 제안에 따라 스스로를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라 선언했다. 이는 이 기구가 주권을 가진다는 주장이었다.[9] 6월 20일 회의장이 닫혀 있자 대표들은 근처 실내 테니스장(죄 드 폼)으로 옮겨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테니스코트 서약). 6월 23일 국왕은 친림 회의에서 신분별 회의를 다시 명령했으나 제3신분은 따르지 않았고, 결국 6월 27일 루이 16세는 성직자와 귀족 대표에게도 국민의회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10] 국민의회는 7월 9일 헌법 제정을 임무로 내세워 '국민제헌의회'로 이름을 바꿨다.[9]
루이 16세가 7월 11일 인기 있던 재무장관 네케르를 해임하고 군대를 파리 주변에 모으자, 파리 시민들은 의회가 해산될 것을 두려워했다. 7월 14일 무기를 찾던 군중은 화약과 대포를 보관하던 바스티유 요새를 에워쌌다. 협상이 엇갈리는 사이 총격전이 벌어졌고, 오후에 프랑스 근위대 일부가 대포를 끌고 군중에 가담하자 요새 사령관 드 로네는 항복했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공격하던 쪽에서 98명, 수비대에서 1명이 죽었고(83명으로 보는 자료도 있다), 드 로네는 시청으로 끌려가다 살해되었다.[11]
바스티유는 국왕의 체포 영장(봉인장)으로 사람을 가두던 전제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그날 갇혀 있던 사람은 위조범 4명, 정신 질환자 2명, 가족의 요청으로 갇힌 백작 1명 등 7명뿐이었다.[11] 함락 뒤 요새는 곧 헐렸다. 7월 14일은 1880년 프랑스의 국경일이 되었다.[12] 바스티유 함락 소식을 듣고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였고,[11] 7월 17일 파리를 방문해 혁명의 상징인 삼색 모표를 받았다.[4] 파리에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방위대와 새 시정부(코뮌)가 들어섰다.
7월 하순 농촌에서는 귀족이 농민을 해치려 한다는 소문 속에 농민들이 영주의 성을 습격하고 부과조 장부를 불태웠다(대공포). 수천 건의 봉기 소식이 쏟아지자 국민의회는 8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대표들이 차례로 특권을 내려놓은 끝에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고 결의했다. 인신 예속과 관련된 권리는 보상 없이 없앴지만, 토지에 붙은 부과조 상당수는 농민이 돈을 내고 사들이도록 했다. 십일조, 관직 매매, 영주 재판권도 폐지되었다.[13] 유상 폐지 조항은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고 1793년 산악파 정부가 남은 부과조를 무상으로 폐지했다.
1789년 8월 20~26일 국민의회는 전문과 17개 조로 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라파예트가 토머스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쓴 초안을 바탕으로 40명가량의 위원회가 다듬은 것이다.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 살아간다"고 선언했고, 제2조는 자유, 소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을 자연권으로 꼽았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제3조), 법은 일반 의지의 표현이며(제6조), 누구도 법이 정한 경우가 아니면 체포되지 않는다(제7조). 신앙과 표현의 자유도 담겼다.[14][15]
선언은 1776년 버지니아 권리장전과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보편 원리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를 넘어섰다고 평가되며,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못 박은 제17조처럼 이를 쓴 엘리트층의 이해도 반영했다.[14] 선언은 1791년 헌법의 전문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프랑스 헌법위원회가 위헌 심사의 기준으로 삼는 '헌법 블록'의 일부다.[16]
선언의 '인간'과 '시민'에 여성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극작가 올랭프 드 구주는 1791년 이에 맞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펴냈고, 1793년 11월 3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7]
빵값이 계속 오르는 가운데 1789년 10월 5일 파리 여성들을 앞세운 군중이 베르사유로 행진했다. 이튿날 군중은 궁전에 난입했고, 왕실은 파리 튈르리궁으로 옮겨져 사실상 감시 아래 놓였다. 국왕은 그동안 미뤄 온 8월 법령과 권리 선언을 이때 승인했다.[4][6]
국민제헌의회는 1791년까지 구체제를 대신할 제도를 잇달아 만들었다. 1789년 11월 교회 재산을 몰수해 이를 담보로 아시냐(assignat)라는 채권을 발행했고, 이것이 곧 지폐처럼 쓰이면서 남발되어 심한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1790년에는 지방을 83개 데파르트망(도)으로 재편했고, 7월 성직자 시민 헌장으로 성직자를 국가가 봉급을 주는 선출직 공무원으로 만들었다.[18] 교황과 성직자 다수가 이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서 교회는 서약파와 거부파로 갈라졌고, 이는 서부 농촌의 반혁명 감정을 키웠다. 1791년 6월 14일 르샤플리에법은 같은 직종 사람들의 결사와 파업을 금지했다.[19] 선거권은 일정 액수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능동 시민'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의장석에서 볼 때 오른쪽에 보수파, 왼쪽에 급진파가 앉은 혁명기 의회의 좌석 배치에서 '우익'과 '좌익'이라는 말이 생겼다.
1791년 4월 왕실과 의회 사이를 잇던 미라보가 죽은 뒤, 국왕 일가는 6월 20일 밤 변장하고 튈르리궁을 빠져나가 동부 국경의 왕당파 군대가 있는 몽메디로 향했다. 그러나 21일 밤 바렌에서 붙잡혀 파리로 되돌아왔다.[4] 이 사건으로 국왕은 입헌 군주로서의 신뢰를 잃었다. 7월 17일 국왕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 서명을 받으려고 샹드마르스에 모인 군중에게 라파예트의 국민방위대가 발포해 수십 명이 죽었다(샹드마르스 학살).[20]
8월 27일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은 필니츠 선언을 내 프랑스 국왕의 처지가 "유럽 모든 군주의 공동 관심사"라고 밝혔다. 다른 열강이 함께해야 행동하겠다는 조건이 붙은 선언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혁명을 끝내려는 전쟁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21] 9월 3일 입헌 군주정을 규정한 1791년 헌법이 확정되어 국왕이 이를 받아들였고, 국민제헌의회는 해산했다. 10월 1일 새로 선출된 입법의회가 열렸다.[4]
입법의회에서는 브리소를 중심으로 한 지롱드파가 혁명을 지키고 유럽에 퍼뜨리려면 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궁정은 프랑스가 패하면 왕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전쟁을 바랐다. 로베스피에르는 군대가 준비되지 않았다며 전쟁에 반대했다.[4][20] 1792년 4월 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었다.[1] 이 무렵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이 「라인 군을 위한 군가」를 지었는데, 8월 마르세유 의용병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파리에 들어온 데서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이 붙었다.[22]
전쟁 초기 프랑스군은 장교 상당수가 망명한 탓에 연패했다. 7월 25일 연합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왕실에 해가 가면 파리를 응징하겠다는 선언을 내자 분노가 폭발했다.[4] 8월 10일 파리 상퀼로트(하층 민중)와 지방에서 올라온 의용병이 튈르리궁을 습격해 궁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를 학살했고, 입법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정지했다. 프로이센군이 국경 요새를 함락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9월 2일부터 6일까지 파리 군중이 감옥을 습격해 수감자 약 1,200명을 즉결 처형했다(9월 학살). 희생자 가운데 220명 넘게가 서약을 거부한 성직자였다.[23] 9월 20일 프랑스군은 발미에서 프로이센군을 막아 내 혁명 전쟁의 첫 큰 승리를 거뒀다.
새로 뽑힌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1일 왕정을 폐지했고, 이튿날부터를 공화국 원년으로 삼았다(제1공화국).[4][24] 국민공회에서는 지방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온건한 지롱드파와, 의석 높은 곳에 앉아 산악파(몽타냐르)라 불린 로베스피에르·당통·마라 중심의 자코뱅 급진파가 맞섰다.
11월 튈르리궁의 비밀 벽장에서 국왕이 외국·망명 귀족과 내통한 문서가 나오자 국왕 재판이 결정되었다. '시민 루이 카페'는 12월 두 차례 국민공회에 나와 심문을 받았고, 1793년 1월 18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표결 수는 집계 방식에 따라 다르게 전한다. 브리태니커는 사형 387표(조건부 26표 포함) 대 334표, 1월 19일 집행 유예 표결은 380 대 310으로 부결이었다고 쓴다.[4] 조건 없는 즉시 처형 표만 세어 361표로 과반을 겨우 넘겼다는 집계도 널리 인용된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오전 혁명 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국왕 처형 뒤 프랑스는 2월 영국·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했고,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영국·스페인 등이 가세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영국의 관심은 혁명 이념보다 프랑스의 대륙 제패를 막는 데 있었다.[25]
1793년 봄 공화국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2월 징집령에 반발해 3월 서부 방데에서 가톨릭·왕당파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3월 18일 네르빈던 전투에서 진 장군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18] 4월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를 만들어 전쟁과 행정을 맡겼는데, 1793년 7월부터 1794년 7월까지 12명의 위원이 사실상 정부 역할을 했다.[26] 6월 2일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포위하자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체포되었고 산악파가 권력을 잡았다.[20] 산악파는 남성 보통 선거와 '봉기의 권리'를 담은 1793년 헌법을 만들었지만 전시라는 이유로 시행하지 않았다. 7월 13일 지롱드파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가 마라를 욕조에서 칼로 찔러 죽였고, 코르데는 나흘 뒤 처형되었다.[27]
1793년 9월 5일 국민공회는 "공포를 일정에 올린다"고 결의했다. 9월 17일 혐의자법은 반혁명 혐의자를 즉시 구금하게 했고, 생필품 가격을 묶는 최고 가격제가 시행되었으며, 지방에는 파견 의원과 감시위원회가 '지방의 공포'를 폈다.[28][29]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고,[6] 10월 말에는 지롱드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에베르파는 교회를 폐쇄하고 '이성의 숭배'를 퍼뜨리는 비기독교화 운동을 벌였고, 공화력도 이 흐름에서 만들어졌다.[28] 1794년 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 연설에서 "덕이 없는 공포는 치명적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하다"며 공포를 "신속하고 엄격하며 굽히지 않는 정의"라 불렀고, "혁명 정부는 폭정에 맞선 자유의 전제"라고 했다.[30]
1794년 봄 공안위원회는 좌우의 반대파를 차례로 제거했다. 3월 24일 에베르와 그 지지자들이, 4월 5일 관용을 주장한 당통과 데물랭이 처형되었다. 6월 8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최고 존재의 제전'이 열렸고, 6월 10일 프레리알 22일 법은 피고의 변호인 조력과 공개 변론을 없애고 배심원에게 무죄와 사형 가운데 하나만 고르게 했다. 이후 7월 말까지 파리에서만 약 1,400명이 처형된 이 시기를 '대공포 정치'라 부른다.[28]
공포 정치의 희생 규모는 추정이 갈린다. 브리태니커는 약 30만 명이 체포되었고 약 1만 7천 명이 공식 처형되었으며, 재판 없이 죽거나 옥사한 사람은 1만 명에서 2만 3천 명 정도라고 쓴다.[28] 같은 시기 공포 정치가 만든 대규모 징집군은 전세를 뒤집어 외국군의 침입을 막아 냈다.[28]
1793년 3월 시작된 방데 반란의 반란군은 한때 3만 명을 넘었고 '가톨릭 왕당군'을 자처했다. 10월 17일 숄레에서 패한 주력은 루아르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가 12월 르망 전투에서 크게 졌는데, 이 전투와 이어진 포로 학살로 약 1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국군 사령관 튀로의 가혹한 보복은 저항을 더 키웠다. 낭트에서 수감자를 루아르강에 빠뜨려 죽인 수장 처형과 함께 방데 진압은 혁명 정부의 가장 잔혹한 폭력으로 꼽힌다. 반란은 1795년 라 조네 협정으로 일단 진정되었고 1796년 지도자 샤레트와 스토플레가 처형되며 끝났다.[18] 전체 사망자 규모와 이를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는지는 1980년대 이후 프랑스 학계의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1794년 6월에만 파리에서 1,300명이 처형될 만큼 공포가 심해지는 사이 전세가 나아지자, 공포 정치를 계속할 명분은 약해졌다.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반역 의원들이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이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한 의원들은 이튿날 테르미도르 9일(7월 27일) 그의 발언을 가로막고 체포를 결의했다.[31] 시청으로 피신한 로베스피에르는 그날 밤 붙잡혔고, 7월 28일 생쥐스트·쿠통 등 지지자 21명과 함께 혁명 광장에서 처형되었다.[20]
이어 자코뱅 클럽이 폐쇄되고 감옥이 비워졌으며, 1794년 12월 24일 최고 가격제가 폐지되었다.[31][32] 남부에서는 자코뱅에 대한 보복 학살인 '백색 공포'가 일었다. 물가가 치솟자 1795년 4월과 5월(프레리알 1일, 5월 20일) 파리 상퀼로트가 봉기했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파리 민중은 더 이상 혁명을 움직이지 못했다.[24]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왕당파가 파리에서 일으킨 봉기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진압했다.
1795년 헌법(공화력 3년 헌법)에 따라 1795년 11월 총재 정부가 들어섰다. 입법부는 법안을 내는 500인회와 40세 이상 250명으로 된 원로원의 양원제였고, 행정은 원로원이 뽑는 5명의 총재가 맡았다. 공포 정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정권을 일부러 약하게 만든 체제였다.[33] 총재 정부는 부패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랑제콜 같은 교육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를 회복시켰다.[33]
총재 정부는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군대를 빌려 뒤집었다. 1797년 9월 4일(프뤽티도르 18일)에는 왕당파가 이긴 선거를 무효로 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1798년과 1799년에도 의회와 총재를 숙청했다.[34] 그사이 전쟁에서는 나폴레옹이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오스트리아를 꺾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끌어냈고, 1798년 7월 영국의 인도 항로를 끊겠다며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이 원정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불렀다.
총재가 된 시에예스는 탈레랑과 함께 정부를 갈아엎을 쿠데타를 꾸미고, 이집트에서 돌아와 환영받던 나폴레옹을 끌어들였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원로원은 '자코뱅의 음모'를 핑계로 양원을 파리 밖 생클루궁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튿날 500인회에서 야유를 받고 쫓겨나다시피 한 나폴레옹 대신, 500인회 의장이던 동생 뤼시앵과 뮈라가 척탄병을 들여보내 의원들을 해산시켰다. 총재 정부는 폐지되고 나폴레옹, 시에예스, 로제 뒤코의 3인 통령 정부가 들어섰다.[2] 이 사건은 흔히 사실상 프랑스 혁명의 끝으로 여겨진다.[2] 이후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의 가장 큰 식민지는 오늘날의 아이티인 생도맹그로, 노예 노동으로 설탕과 커피를 생산했다. 권리 선언이 채택되었지만 식민지 농장주들의 반대로 노예제와 유색 자유인 차별은 그대로 남았다. 1791년 8월 생도맹그에서 대규모 노예 봉기가 일어났다(아이티 혁명). 현지에 파견된 혁명 정부 위원들이 1793년 먼저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국민공회는 1794년 2월 4일 모든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하고 식민지에 사는 모든 사람을 피부색과 관계없이 프랑스 시민으로 인정했다.[35] 그러나 통령 정부는 1802년 르클레르 원정군을 생도맹그에 보내 투생 루베르튀르의 세력을 꺾으려 했고,[36] 이 싸움은 1804년 아이티 독립으로 끝났다.
혁명은 신분제와 봉건적 특권을 없애고 법 앞의 평등을 확립했다. 혁명기의 여러 법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1791년 국민의회 결의와 1793~1794년 국민공회의 초안을 거쳐 1804년 3월 21일 나폴레옹 민법전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 법전은 19세기 유럽 대륙과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 민법의 본보기가 되었다.[37]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데파르트망 행정 체계와 국민 징병제도 혁명기에 만들어졌다.
1795년 4월 7일(제르미날 18일) 법으로 미터법이 도입되었고, 1799년 6월 22일 1미터와 1킬로그램의 기준이 되는 백금 원기가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단위계(SI)의 출발점이다.[38] 반면 1792년 9월 22일을 원년 첫날로 삼고 한 달을 10일씩 셋으로 나눈 공화력(1793년 10월 도입)은 1806년 1월 1일 폐지되었다.[24] 「라 마르세예즈」는 1795년 7월 14일 국가로 정해졌다가 제정과 왕정복고기에 금지되었고, 1879년 제3공화국에서 다시 국가가 되었다.[22]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는 한 세기 가까이 혁명을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으로 갈렸고, 왕정복고, 7월 혁명, 2월 혁명, 제2제국을 거쳐 1870년대 제3공화국에 와서야 공화정이 자리 잡았다. 브리태니커는 혁명이 대의 민주주의와 재산권의 관념을 뿌리내리게 했고 1830년과 1848년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한다.[1]
혁명 전쟁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져 1815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봉건제 폐지와 법전이 이식되었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반발은 독일, 스페인 등지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나폴레옹 몰락 뒤 빈 회의는 혁명 이전 질서를 되살리려 했지만,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혁명을 둘러싼 논쟁이 크게 벌어졌다.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전통을 부정한 혁명이 공포와 독재로 치달을 것이라고 경고해 근대 보수주의의 고전을 남겼고, 토머스 페인은 1791년 《인간의 권리》로 반박했다.[39] 미국에서는 혁명에 대한 태도를 두고 친프랑스적인 제퍼슨의 민주공화당과 친영국적인 해밀턴의 연방파가 갈라섰고, 워싱턴 정부는 유럽 전쟁에 중립을 선언했다. 공포 정치 시기에는 페인이 영국 태생이라는 이유로 파리에서 투옥되었다가 처형 직전 풀려났다.[40]
혁명은 일어난 순간부터 버크와 페인의 논쟁처럼 인간 해방의 출발이라는 평가와 전통을 파괴한 재앙이라는 평가로 갈렸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는 권리 선언을 "새 시대의 신조"라 불렀다.[14]
20세기 중반까지 학계의 주류는 혁명을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연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해석이었다. 소르본 대학교 교수 조르주 르페브르는 농민과 민중의 역할을 실증적으로 연구했고,[41] 그의 뒤를 이은 알베르 소불은 1965년 개설서 첫머리에 "혁명은 프랑스 역사에서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알린다"고 썼다.[42]
이에 대해 영국 역사가 알프레드 코반은 1954년 런던 대학교 교수 취임 강연 〈프랑스 혁명의 신화〉와 1964년 《프랑스 혁명의 사회적 해석》에서 반론을 폈다. 제3신분 대표 다수는 자본가가 아니라 관리·법률가·지주였고, 봉건제 폐지는 농민 봉기가 강요한 것이며, 혁명과 전쟁은 오히려 프랑스 경제를 뒤처지게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퓌레와 드니 리셰가 1965년 이에 가까운 견해를 내놓았고, 퓌레는 혁명을 계급 이익의 충돌보다 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으로 해석하며 혁명이 단절이라기보다 구체제 개혁 시도의 연장이라는 토크빌의 해석을 되살렸다. 이런 '수정주의' 해석이 힘을 얻으면서 1989년 혁명 200주년 학술 행사와 출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식 계급 투쟁 설명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42]
공포 정치를 외국의 침입과 내전이라는 비상 상황이 낳은 산물로 볼지, 혁명 이념 자체에 들어 있던 폭력의 논리로 볼지도 오래된 쟁점이다. 1986년 레날 세셰가 방데 진압을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제노사이드'로 규정한 책을 내면서 방데 문제는 200주년을 앞두고 정치적 논쟁으로 번졌고, 영국 역사가 휴 고프는 이 논쟁을 다룬 서평 논문 〈제노사이드와 200주년〉(1987)을 썼다.[43] 방데 전쟁의 전체 사망자 추정은 학자에 따라 크게 차이 난다.
1791년 6월 바렌 도주 때 국왕 일가를 알아본 사람은 생트므누의 역참장 장바티스트 드루에였다. 그는 뒤에 남긴 진술에서 마차 안의 남자 얼굴이 가지고 있던 아시냐 지폐에 찍힌 국왕 초상과 닮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드루에는 말을 달려 바렌에서 마차를 따라잡았고, 그곳 관리가 마차를 수색하게 했다.[46]
철거 업자 피에르프랑수아 팔루아는 바스티유의 쇠붙이로 잉크병을, 돌로 문진을, 벽돌로 요새 모형을 만들어 팔았고 돌 조각을 전국 각지에 보내 전시하게 했다. 이는 바스티유 함락의 신화화에 한몫했지만, 그 바람에 요새는 기초 일부만 남았다.[11]
단두대(기요틴)는 의사이자 국민의회 의원이던 조제프이냐스 기요탱의 이름을 땄지만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만 누리던 참수형을 모든 사형수에게 고통 없이 집행하자며 "기계로" 사형을 집행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데 힘썼다. 장치를 설계한 외과의사 앙투안 루이의 이름을 따 처음에는 '루이제트'라고도 불렸다. 1792년 4월 25일 노상강도 처형에 처음 쓰였고, 프랑스에서는 1977년까지 쓰이다가 1981년 사형제 폐지로 사라졌다.[47]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구체제에서 세금 징수를 도급받던 징세 청부 조합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1794년 5월 8일 장인과 다른 조합원 26명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48]
- 《두 도시 이야기》(1859): 찰스 디킨스의 소설. 혁명 전후의 런던과 파리가 배경이다.[51]
- 《스칼렛 핌퍼넬》: 오르치 남작부인의 작품으로 1903년 연극, 1905년 소설로 나왔다. 영국 귀족 퍼시 블레이크니가 공포 정치 시기 프랑스 귀족들을 구출하는 이야기다.[52]
- 《베르사유의 장미》: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로, 1972년부터 일본 슈에이샤의 순정 만화 잡지 《주간 마거릿》에 연재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상 인물 오스칼을 중심으로 혁명 전후를 그렸고, 1974년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무대에 올렸다.[53]
- 《당통》(Danton, 1983): 폴란드 감독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 공포 정치 시기 당통의 마지막 나날을 다룬다.[54]
- 《마리 앙투아네트》(2006):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앤토니아 프레이저의 전기를 바탕으로 왕비를 동정적으로 그렸다.[55]
-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유비소프트의 게임. 혁명기 파리가 배경이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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