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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랑통 정신병원(Asile de Charenton, Maison de Charenton)은 프랑스 파리 남동쪽 근교 생모리스(옛 이름 샤랑통생모리스)에 있던 정신병원이다. 17세기 가톨릭 수도회가 세운 빈민 구호소에서 출발해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질환자 수용 시설이 됐고, 지금은 에스키롤 병원(Hôpital Esquirol)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드 후작이 생애 마지막 11년을 보내며 환자들과 연극을 올린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일은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사드》와 영화 《퀼스》의 소재가 됐다. 19세기에는 프랑스 정신의학의 개척자 장에티엔 에스키롤이 수석 의사로 일하며 병원 건물을 새로 짓게 했고, 이 건물은 프랑스 역사기념물로 지정돼 있다.[1]

기본 정보
위치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드마른주 생모리스, 마레샬르클레르 거리 57[1]
설립 1641년[1][2]
설립 주체 성 요한 하느님의 형제회(자선 수도회)[2]
지금 건물 1838~1886년, 건축가 에밀 질베르 설계, 아르튀르 디에 완공[1]
문화재 역사기념물 지정(1998년 4월 9일)[1]
현재 소속 파리동부 발드마른 병원(Hôpitaux Paris Est Val-de-Marne, HPEVM)[3]

'샤랑통'이라는 이름은 병원이 있던 옛 마을 샤랑통생모리스에서 왔다. 이 마을은 지금의 생모리스이고, 바로 옆 도시 샤랑통르퐁과는 다른 곳이다.[4] 병원의 공식 이름은 시대마다 바뀌었다.[2]

이름 변화
시기 이름
설립 당시 노트르담 드 라 페 자선병원(Hôpital de Notre-Dame de la Paix de la Charité de Charenton)
제정·왕정 시기 샤랑통 제국 요양원(Maison impériale), 샤랑통 왕립 요양원(Maison royale)
1871년부터 샤랑통 국립 요양원(Maison nationale de Charenton)
그 뒤 생모리스 국립 구호시설(Établissement national de bienfaisance de Saint-Maurice)
현재 에스키롤 병원(가장 유명한 의사 에스키롤의 이름)

수도회 시절 (1641~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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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 9월 13일 루이 13세의 고문이자 전쟁 감사관이던 세바스티앵 르블랑이 샤랑통생모리스 교구에 있는 집과 땅을 자선 수도회 형제들에게 기증했다. 조건은 형제들이 그곳에 살면서 가난한 병자를 돌보는 것이었고, 처음 병상은 다섯 개였다. 수도사들이 실제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45년 5월 16일이다.[4] 그래서 자료에 따라 설립 연도가 1641년과 1645년으로 갈린다. 프랑스 문화부 문화재 기록과 프랑스 정신의학사 연구자 미셸 케르는 기증이 이뤄진 1641년을 설립 연도로 본다.[1][2] 1662년 5월 4일 문서에서 병상은 일곱 개로 늘었다.[4]

1660년 9월 파리 고등법원은 정신질환자를 오텔디외 병원의 전용 병동에서 돌보도록 판결했다. 이들 가운데 형편이 나은 환자는 곧 샤랑통 같은 작은 시설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샤랑통은 가난한 병자보다 비용을 낼 수 있는 정신질환자를 주로 받았다. 17세기 말에는 남성 정신질환자를 가두는 별도 건물이 세워졌고, 1701년에는 정신질환자 전용 예배당이 생겼다.[4]

18세기에는 국왕의 체포 영장인 봉인장(lettre de cachet)으로 보내진 수감자도 받았다. 1720년 기록을 보면 가난한 환자 말고도 수감자가 보통 120명 있었고, 대부분 국왕 명령으로 바스티유 감옥 같은 곳에서 옮겨 온 사람이었다. 시설이 커지자 형제회는 1768년 샤랑통생모리스 영지를 사들였다.[4]

혁명과 재개원 (1792~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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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4월 18일 수도회를 폐지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병원은 문을 닫았다. 1795년 7월 30일 공안위원회는 병원을 완전히 비우라고 명령했고, 환자들은 흩어졌으며 건물은 약탈당한 뒤 뱅센 감옥에 딸린 국가 감옥으로 쓰였다.[4]

1797년 6월 15일 총재정부가 병원을 다시 열기로 했다. 이때부터 병원은 종교 기관이 아니라 내무부 감독을 받는 국가 시설이 됐고, 프레몽트레 수도회 원장 출신인 쿨미에 신부(François Simonnet de Coulmier)가 운영을 맡았다. 1810년 입원자는 328명이었다.[4] 쿨미에는 음악, 무도회, 연극 같은 오락을 치료에 쓰는 방식을 시도했고, 사드 후작이 환자와 직업 배우를 모아 연극을 올린 것도 그의 허락 덕분이었다.[5]

1805년 앙투안아타나즈 루아예콜라르가 원장 쿨미에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석 의사로 임명됐다. 두 사람의 갈등은 1814년 쿨미에가 내무부 장관의 신임을 잃고 물러날 때까지 이어졌다. 루아예콜라르는 1819년 파리 의과대학에 처음 생긴 정신의학 강좌를 맡았다.[6]

장에티엔 에스키롤은 1826년부터 수석 의사로 일했다.[1] 필리프 피넬의 제자인 에스키롤은 정신병원이 사람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회복을 돕는 도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환자 300명을 받을 새 병원을 계획했다.[4]

새 건물과 20세기 (183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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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병원의 첫 돌은 1838년 10월 30일 놓였다.[4] 건축가 에밀 질베르가 에스키롤의 이론에 따라 설계했고, 질베르의 설계를 이어받은 아르튀르 디에가 1886년 완공했다. 가운데에 공용 시설 건물을 두고 양옆에 환자 병동을 따로 떨어뜨려 배치한 뒤 회랑으로 둘러싸는 구성으로, 당시 정신병원 설계 이론을 잘 보여 준다.[1] 공사는 예산 부족으로 6년 만에 멈췄다가 1865년 다시 시작됐다.[4]

이 병원 간호 인력이 임금과 처우 개선을 처음 요구한 기록은 1888년의 것이다. 1906년 4월 18일에는 생모리스 국립병원 직원 협회가 만들어졌다.[4]

제1차 세계 대전 뒤 출산 장려 정책에 따라 1920년 병원을 국립 산과 병원으로 바꾸는 법이 만들어졌다. 계획은 일부만 실현돼 정신병원 기능은 그대로 남았고, 1958년 들어선 산과 시설은 뒤에 산부인과로 이어졌다. 1970년 국립병원은 파리 도의 자율 공립병원이 됐다.[4]

건물은 1979년 12월 27일 한 차례 문화재 등록됐다가 취소된 뒤, 1998년 4월 9일 전체 건물의 정면과 지붕, 예배당, 바깥 계단, 처음 담장 등이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1]

2011년 1월 1일 에스키롤 공립보건기관(EPS Esquirol)과 이웃한 생모리스 국립병원이 합쳐 '생모리스 병원'(Hôpitaux de Saint-Maurice)이 됐다. 정신의학을 맡던 에스키롤과 재활 치료를 맡던 생모리스 국립병원이 한 기관이 된 것이다.[7] 2024년 1월에는 생모리스 병원과 라크앙브리의 레 뮈레 병원이 다시 합쳐 '파리동부 발드마른 병원'(HPEVM)이 됐다.[3]

사드 후작과 샤랑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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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후작은 샤랑통에 두 번 갇혔다.

사드 후작의 샤랑통 생활
날짜 일
1789년 7월 4일 바스티유 감옥에서 샤랑통으로 옮겨짐. 열흘 뒤 바스티유가 함락됨[8]
1790년 4월 2일 국민의회가 봉인장을 폐지하면서 풀려남[8]
1803년 4월 27일 비세트르 감옥에서 다시 샤랑통으로 옮겨짐. 공개 재판과 추문을 피하려는 조치였고, 비용은 가족이 댐[5]
1804년 8월 오랜 동반자 마리콩스탕스 케네가 옆방에 들어와 함께 지냄[5]
1807년 6월 5일 열 권짜리 소설 《플로르벨의 나날》 원고를 경찰이 압수함[5]
1809년 10월 18일 경찰 명령으로 독방에 갇히고 펜과 종이를 빼앗김. 쿨미에가 나서서 처우를 누그러뜨림[5]
1813년 5월 6일 정부가 쿨미에에게 모든 연극 공연을 중단하라고 명령함[5]
1814년 12월 2일 74세로 샤랑통에서 사망[5]

사드의 전기를 쓴 닐 셰퍼에 따르면 쿨미에는 사드를 보호하며 다른 환자와 직업 배우들을 이끌고 연극을 올리게 했고, 공연은 곧 파리 상류층 관객이 찾아올 만큼 인기를 끌었다. 다만 무대에 오른 작품은 당시 파리 극장에서 흔히 하던 평범한 연극이었다. 쿨미에는 키가 4피트(약 120cm)에 몸이 심하게 굽은 사람이었고, 사드가 평생 처음 사귄 남자 친구였을 것이라고 셰퍼는 적었다. 루아예콜라르는 쿨미에의 연극 치료와 사드가 감옥이 아닌 병원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가 쿨미에 대신 자기 사람을 원장에 앉혔을 때는 연극이 중단된 지 오래였고 사드는 생애 마지막 해였다.[9]

샤랑통에서 사드는 직원의 딸 마들렌 르클레르와 관계를 맺었다. 그의 일기에는 1814년 7월 21일이 두 사람의 57번째 만남으로 적혀 있고, 사드는 그녀에게 읽고 쓰기도 가르쳤다.[5]

《마라/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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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페터 바이스의 희곡 《샤랑통 정신병원 환자들이 사드 후작의 연출로 공연한 장폴 마라의 박해와 암살》, 줄여서 《마라/사드》는 1808년 샤랑통 병원 목욕장을 무대로, 사드가 환자들을 배우로 삼아 혁명가 마라의 죽음을 연극으로 올리는 극중극이다. 1964년 서베를린 실러 극장에서 초연됐고, 같은 해 피터 브룩이 런던 올드위치 극장에서 영어판을 올리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작품에는 원장 쿨미에가 나와 예술과 음악을 쓰는 샤랑통의 앞선 치료를 자랑하다가 공연이 과격해지자 계속 끼어든다.[10]

  • 퀼스: 사드 후작이 샤랑통에 갇혀 지낸 말년을 그린 2000년 영화다. 병원을 운영하는 젊은 쿨미에 신부(호아킨 피닉스)와 나폴레옹 정부가 보낸 루아예콜라르 박사(마이클 케인)가 사드를 두고 맞선다. 실제 역사와 달리 루아예콜라르를 잔혹한 악역으로 그렸고, 사드의 원고를 몰래 내보내는 일도 실제로는 마들렌이 아니라 동반자 케네가 했다.[9] 샤랑통 실내는 영국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세트로 지었다.[11]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Hôpital Esquirol (ancien asile de Charenton), 프랑스 문화부 POP 플랫폼(메리메 데이터베이스 PA00079904), 2026-10-11 확인.
  2. ↑ 2.0 2.1 2.2 2.3 Michel Caire, Charenton, Histoire de la psychiatrie en France, 2008, 2026-10-11 확인.
  3. ↑ 3.0 3.1 Hôpitaux Paris Est Val-de-Marne (site hospitalier de Saint-Maurice), hopital.fr(프랑스 병원연맹), 2026-10-11 확인.
  4. ↑ 4.00 4.01 4.02 4.03 4.04 4.05 4.06 4.07 4.08 4.09 4.10 4.11 The Esquirol Hospital, Serpsy, 2016-10-07 보관본.
  5. ↑ 5.0 5.1 5.2 5.3 5.4 5.5 5.6 5.7 Neil Schaeffer, The Marquis de Sade: Timeline, Asylum (1804-1814), 2016-11-15 보관본.
  6. ↑ Michel Caire, Antoine Royer-Collard, Histoire de la psychiatrie en France, 2026-10-11 확인.
  7. ↑ Pascal Thomeret, Hôpitaux de Saint-Maurice, Le Quotidien du Médecin, 2018-08-14.
  8. ↑ 8.0 8.1 Neil Schaeffer, The Marquis de Sade: Timeline (1772-1790), 2016-11-15 보관본.
  9. ↑ 9.0 9.1 Neil Schaeffer, Perverting de Sade, The Guardian, 2001-01-13.
  10. ↑ Marat/Sade, Drama for Students(Gale), encyclopedia.com, 2026-10-11 확인.
  11. ↑ Quills, The Worldwide Guide to Movie Locations, 2026-10-1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