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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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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은 1348년(충목왕 4) 개풍군 부소산 경천사에 세운 고려 후기의 대리석 탑으로, 원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모습이며 일제 강점기 일본에 무단 반출되었다가 돌아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서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서 있는 경천사지 십층 석탑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나 이 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1층 몸돌에 새긴 글에 따르면 1348년 3월 세웠고, 진녕부원군 강융과 원에서 출세한 환관 고용봉(고용보) 등이 시주가 되어 원 황제와 황태자·황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장인을 데려와 탑을 만들었다는 말을 전하고, 조선 성종 때 채수는 기황후의 원찰이라 적어, 탑을 세운 주체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1]

  • 구조 - 3단의 기단 위에 10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탑신 1~3층은 위에서 보면 아(亞) 자 모양이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이다. 4층부터는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에 팔작지붕의 기와골을 새겨 목조 건축처럼 보인다.[2]
  • 조각 - 기단에는 사자·용·연꽃과 현장 법사의 서역 여행(서유기) 장면, 나한이 있고, 탑신 1~4층에는 부처의 설법 장면(불회도), 5~10층에는 부처를 새겼다. 무른 대리석이라 섬세한 조각이 가능했다.
  • 영향 - 1467년(세조 13) 세운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이 탑을 본떴다.[1]
  • 반출(1907) - 1907년 순종의 가례에 특사로 온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탑을 탐냈고, 고종이 거절했는데도 며칠 뒤 일본인들이 무기를 들고 와 탑을 해체해 가져갔다.
  • 반환(1918) - 대한매일신보 등이 거듭 보도하고 헐버트와 베델이 영자 신문으로 부당함을 알렸으며,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때 현지 신문에 이를 폭로했다. 1918년 11월 15일 돌려받았으나 훼손이 심해 경복궁 회랑에 쌓아 두었다.
  • 복원 - 1959~1960년 복원해 경복궁에 세웠고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산성비와 시멘트 풍화로 상하자 1995년 다시 해체해 보존 처리했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다시 세웠다.[1][2]

고려의 탑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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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시기 특징
개성 경천사지 십층 석탑 고려 후기(1348) 대리석, 원의 영향, 아(亞) 자형 기단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고려 전기 다각 다층탑, 송의 영향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 조선 세조(1467) 경천사지 탑을 본뜬 대리석 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 백제 목탑 양식을 따른 석탑

다른 탑은 한국의 석탑을 본다.

  1. ↑ 1.0 1.1 1.2 경천사지 십층석탑,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국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