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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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元干涉期, 1270~1356년)는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부터 공민왕의 반원 개혁 때까지,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시기이다.
- 관제 격하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6부를 4사로, 중추원을 밀직사로 낮추었다. 왕실 호칭도 '짐'을 '고', '태자'를 '세자'로 낮추었다.
- 일본 원정(1274·1281) - 원은 고려에 배를 만들고 군사와 식량을 대게 해 두 차례 일본을 쳤다. 고려군은 김방경이 이끌었고 원의 군대와 함께 여몽 연합군을 이루었으나,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모두 태풍을 만나 실패했다. 배와 군량을 대느라 고려 백성의 부담이 컸다.
- 정동행성 - 1280년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했다가 그 뒤 원과 고려를 잇는 기구로 남았다. 고려 왕이 승상을 겸했고, 부속 기구인 이문소는 친원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 영토 상실 - 화주에 쌍성총관부(1258), 서경에 동녕부(1270), 제주에 탐라총관부(1273)를 두어 땅을 직접 다스렸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뒤에 돌려받았다.
- 다루가치 - 원이 보낸 감찰관으로 내정에 간섭했다.
- 통문관 - 1276년(충렬왕 2) 역관이 말을 제대로 옮기지 않자 김구의 건의로 젊은 관리들에게 한어(중국어)를 익히게 한 기관이다. 뒤에 사역원으로 이어졌다.
- 공물과 공녀 - 금·은·인삼·매 등을 바치게 했고, 결혼도감을 두어 젊은 여성을 공녀로 보냈다.
- 응방 - 원에 바칠 매를 잡아 기르던 관청으로 1275년 처음 두었다. 응방에 속한 사람들이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고 땅과 노비를 늘려 백성을 괴롭혔으므로 여러 번 없앴다가 다시 두었다.[2]
- 몽골풍 -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머리를 깎고 뒷머리만 땋는 머리 모양)과 호복(몽골식 옷)이 유행했다. 족두리, 소주, 말끝에 '-치'를 붙이는 말(장사치) 등도 이때 들어왔다.
- 고려양 - 거꾸로 원에서는 고려의 옷·음식 같은 풍습이 유행했다.
- 권문세족 - 원과 가까운 친원 세력, 역관·환관 출신 등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대농장을 차지했다. 정치는 도평의사사(도당)가 이끌었다.
- 농서 도입 - 1349년(충정왕 1) 이암이 원에서 농서 『농상집요』를 들여왔고, 1372년(공민왕 21) 강시 등이 이를 간행했다.
- 성리학 전래 - 충렬왕 때 안향이 성리학을 들여왔고, 충선왕은 원의 수도에 만권당을 세워 이제현 등이 원의 학자와 교류했다. 이는 뒷날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 사회 모습 | 시기 |
|---|---|
| 지배층에서 변발과 호복이 유행, 응방이 백성을 괴롭힘 | 원 간섭기 |
|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 개경에서 만적이 신분 해방 도모 | 무신 집권기 (→ 무신 집권기의 민란) |
| 흑창을 처음 설치해 가난한 백성을 구제 | 고려 초 태조 (→ 고려의 사회 제도) |
| 서얼이 청요직 진출을 요구하는 통청 운동 | 조선 후기 (→ 서얼) |
| 왕조 교체를 예언하는 예언서 유포 | 조선 후기 (→ 정감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