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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元干涉期, 1270~1356년)는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부터 공민왕의 반원 개혁 때까지,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시기이다.

30여 년에 걸친 고려 몽골 전쟁 끝에 고려는 1259년 몽골과 강화하고, 1270년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왔다. 고려는 나라 이름과 왕실을 유지했지만, 고려 왕이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하는 부마국이 되어 원의 간섭을 받았다.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왕의 묘호에 '충(忠)' 자를 붙인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1356년 공민왕이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없애며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면서 간섭에서 벗어났다.[1]

  • 관제 격하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6부를 4사로, 중추원을 밀직사로 낮추었다. 왕실 호칭도 '짐'을 '고', '태자'를 '세자'로 낮추었다.
  • 일본 원정(1274·1281) - 원은 고려에 배를 만들고 군사와 식량을 대게 해 두 차례 일본을 쳤다. 고려군은 김방경이 이끌었고 원의 군대와 함께 여몽 연합군을 이루었으나,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모두 태풍을 만나 실패했다. 배와 군량을 대느라 고려 백성의 부담이 컸다.
  • 정동행성 - 1280년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했다가 그 뒤 원과 고려를 잇는 기구로 남았다. 고려 왕이 승상을 겸했고, 부속 기구인 이문소는 친원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 영토 상실 - 화주에 쌍성총관부(1258), 서경에 동녕부(1270), 제주에 탐라총관부(1273)를 두어 땅을 직접 다스렸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뒤에 돌려받았다.
  • 다루가치 - 원이 보낸 감찰관으로 내정에 간섭했다.
  • 통문관 - 1276년(충렬왕 2) 역관이 말을 제대로 옮기지 않자 김구의 건의로 젊은 관리들에게 한어(중국어)를 익히게 한 기관이다. 뒤에 사역원으로 이어졌다.
  • 공물과 공녀 - 금·은·인삼·매 등을 바치게 했고, 결혼도감을 두어 젊은 여성을 공녀로 보냈다.
  • 응방 - 원에 바칠 매를 잡아 기르던 관청으로 1275년 처음 두었다. 응방에 속한 사람들이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고 땅과 노비를 늘려 백성을 괴롭혔으므로 여러 번 없앴다가 다시 두었다.[2]

사회와 문화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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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풍 -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머리를 깎고 뒷머리만 땋는 머리 모양)과 호복(몽골식 옷)이 유행했다. 족두리, 소주, 말끝에 '-치'를 붙이는 말(장사치) 등도 이때 들어왔다.
  • 고려양 - 거꾸로 원에서는 고려의 옷·음식 같은 풍습이 유행했다.
  • 권문세족 - 원과 가까운 친원 세력, 역관·환관 출신 등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대농장을 차지했다. 정치는 도평의사사(도당)가 이끌었다.
  • 농서 도입 - 1349년(충정왕 1) 이암이 원에서 농서 『농상집요』를 들여왔고, 1372년(공민왕 21) 강시 등이 이를 간행했다.
  • 성리학 전래 - 충렬왕 때 안향이 성리학을 들여왔고, 충선왕은 원의 수도에 만권당을 세워 이제현 등이 원의 학자와 교류했다. 이는 뒷날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다른 시기의 사회 모습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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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모습 시기
지배층에서 변발과 호복이 유행, 응방이 백성을 괴롭힘 원 간섭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 개경에서 만적이 신분 해방 도모 무신 집권기 (→ 무신 집권기의 민란)
흑창을 처음 설치해 가난한 백성을 구제 고려 초 태조 (→ 고려의 사회 제도)
서얼이 청요직 진출을 요구하는 통청 운동 조선 후기 (→ 서얼)
왕조 교체를 예언하는 예언서 유포 조선 후기 (→ 정감록)
  1. ↑ 정동행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응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