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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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男女老少)는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다 함께라는 뜻으로 쓴다. “남녀노소 누구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처럼 뒤에 ‘모두’, ‘가리지 않고’ 같은 말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행사·상품·놀이 따위가 누구에게나 알맞다고 할 때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처럼 쓰는 것도 흔하다.
중국어에서도 같은 글자로 ‘男女老少(nánnǚ lǎoshào)’라고 하며, ‘남녀노유(男女老幼)’도 널리 쓴다.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男女老幼’를 “모든 사람을 두루 가리킴”으로 풀이하고 ‘男女老少’라고도 한다고 적는다.[2] 일본어에서는 같은 뜻으로 순서가 다른 ‘노약남녀(老若男女, ろうにゃくなんにょ)’를 쓴다.[3]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행정 문서에서 사람 수를 셀 때 이 말을 썼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男女老少’가 22건, ‘男女老幼’가 9건 나온다.[6]
- 1402년(태종 2) 5월에는 요동 방면에서 흩어져 넘어온 군사인 만산군(漫散軍)을 풍해도에 나누어 두면서 “남녀노유를 합해 869명(男女老幼總八百六十九)”이라고 적었다.[7]
- 1407년(태종 7) 1월 사헌부는 절에 딸린 노비를 각 관청에 흩어 보내지 말고 살던 곳에 그대로 모여 살게 하되, “남녀노소를 가려(男女老少,分揀)” 둔전과 신공을 알맞게 정하자고 건의했다.[8]
- 1424년(세종 6) 평안도 감사는 도내 20개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남녀노소 모두 3,188명(飢民男女老少,摠三千一百八十八名)”이라고 보고했다.[9]
문집에서도 김수온(金守溫)이 〈견성암영응기(見性菴靈應記)〉에서 영험한 일이 서울까지 알려지자 남녀노소가 찾아왔다고 적는 등 일찍부터 쓰였다.[10] 실록 국역문에는 ‘남녀노소’가 81건으로 원문보다 훨씬 많은데,[6] 번역자들이 ‘男女老幼’나 ‘男婦老少’ 같은 다른 표현도 이 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433년(세종 15) 여연에서 전사한 군관과 군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기사의 “죽임을 당한 남녀노소 18명(其被殺男婦老少十八人)”도 국역문에서는 ‘남녀노소’로 옮겼다.[11]
- 새 인증 앱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글자를 크게 하고 단계를 줄였다.
- 피싱 문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니, 모르는 링크는 누르지 않는 것이 좋다.
- 마을 잔치에는 남녀노소가 한자리에 모였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남녀노소”,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2%A8%EB%85%80%EB%85%B8%EC%86%8C, 확인날짜=2026-10-01.
- ↑ 2.0 2.1 2.2 2.3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수정본 참고 자료 “男女老幼”,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22265, 확인날짜=2026-10-01.
- ↑ 3.0 3.1 3.2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老若男女”,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80%81%E8%8B%A5%E7%94%B7%E5%A5%B3, 확인날짜=2026-10-01.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노소”,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5%B8%EC%86%8C, 확인날짜=2026-10-01.
- ↑ 나관중(羅貫中),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105회.
- ↑ 6.0 6.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男女老少”·“男女老幼”,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0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5월 30일 임자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ca_10205030_001, 확인날짜=2026-10-0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1월 12일 정묘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ca_10701012_001, 확인날짜=2026-10-0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15일 신유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0602015_004, 확인날짜=2026-10-01.
- ↑ 김수온(金守溫), 〈견성암영응기(見性菴靈應記)〉, 《식우집(拭疣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0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9일 계사 6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502009_006, 확인날짜=2026-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