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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종칠금(七縱七擒)은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는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촉한의 제갈량(諸葛亮)이 남중(南中)의 우두머리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1] 줄여서 ‘칠금(七擒)’이라고도 한다.[2]

힘으로 눌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진심으로 굴복할 때까지 너그러이 대해 마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많이 쓴다. 《성어전》도 “뒤에 계책을 잘 써서 상대를 진심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을 비유한다”고 풀이한다.[3] 한편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처럼 ‘상대를 손바닥 위에서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으로도 쓴다.[1]

중국어에서는 순서를 바꾼 ‘七擒七縱(칠금칠종)’을 주로 쓰고 《성어전》도 이 형태를 표제어로 삼는다.[3] 일본어에서는 ‘七縦七擒(しちしょうしちきん)’이라 하며,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은 출전을 《촉지》 제갈량전 주가 인용한 《한진춘추》로 들고 당나라 장효표(章孝標)의 〈제갈무후묘(諸葛武侯廟)〉 시를 용례로 든다.[4]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七 칠 일곱 일곱 번
縱 종 세로, 놓아주다 놓아 보내다
七 칠 일곱 일곱 번
擒 금 사로잡다 사로잡다

유래: 정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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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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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陳壽)의 《삼국지》 〈제갈량전〉 본문에는 남중 정벌이 아주 짧게 적혀 있다. “(건흥) 3년(225)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여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하였다. 군수 물자가 여기서 나와 나라가 넉넉해졌다(三年春,亮率眾南征,其秋悉平。軍資所出,國以富饒)”는 것이 전부이며, 맹획의 이름도 일곱 번 사로잡은 이야기도 없다.[5]

배송지 주가 인용한 《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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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남조 송나라 배송지가 이 대목에 단 주석에서 동진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한 데 나온다.[5]

亮至南中,所在戰捷。聞孟獲者,為夷、漢所服,募生致之。既得,使觀於營陳之間,問曰:「此軍何如?」獲對曰:「向者不知虛實,故敗。今蒙賜觀看營陳,若祇如此,即定易勝耳。」亮笑,縱使更戰,七縱七禽,而亮猶遣獲。獲止不去,曰:「公,天威也,南人不復反矣。」遂至滇池。

“제갈량이 남중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이겼다. 맹획이 이인(夷人)과 한인(漢人) 모두에게 신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로잡아 오게 했다. 붙잡은 뒤 진영을 둘러보게 하고 ‘이 군대가 어떠한가?’ 하고 묻자 맹획은 ‘전에는 허실을 몰라서 졌지만, 이제 진영을 보니 이 정도라면 쉽게 이길 수 있겠다’고 했다. 제갈량은 웃으며 놓아주어 다시 싸우게 했다.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는데도 제갈량이 또 맹획을 보내려 하자, 맹획은 떠나지 않고 ‘공은 하늘의 위엄이시니 남쪽 사람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전지(滇池)에 이르렀다.”

원문은 ‘擒’이 아니라 ‘禽’으로 되어 있다. 두 글자는 ‘사로잡다’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 《태평어람》이 같은 대목을 인용한 곳에서는 ‘七縱七擒’으로 적혀 있다.[6] 같은 주석에는 남중에 관리만 두고 군사를 남기지 않는 까닭을 묻는 말에 제갈량이 “외인을 남기면 군사를 남겨야 하는데 군사를 남기면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첫째 어려움…”이라며 세 가지 어려움을 들어 토착 우두머리들을 그대로 쓴 일도 실려 있다.[5]

《화양국지》와 《양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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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 〈남중지(南中志)〉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225년 여름 5월 노수(瀘水)를 건넌 제갈량이 맹획을 생포해 군중을 보여 주자 맹획은 “서로를 몰라서 그랬을 뿐, 공은 쉽게 이길 상대”라고 했다. 제갈량은 북쪽의 일이 급한데 남중이 자주 반란하므로 그 속임수를 끝까지 다해 보게 하려고 맹획을 풀어 주어 다시 싸우게 했는데, “모두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풀어 주었다(凡七虜、七赦)”. 맹획 등은 마음으로 복종했고 “명공은 하늘의 위엄이니 변방 백성은 길이 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같은 책은 뒤에 맹획이 촉한 조정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올랐다고 적었다.[7]

〈마량전〉 배송지 주가 인용한 《양양기(襄陽記)》에는 이 정벌의 방침이 나온다. 출정하는 제갈량을 수십 리 배웅한 마속(馬謖)은 “용병의 도는 마음을 치는 것이 으뜸이고 성을 치는 것은 그다음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으뜸이고 군사로 싸우는 것은 그다음(用兵之道,攻心為上,攻城為下,心戰為上,兵戰為下)”이라고 조언했다. 제갈량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을 놓아주어 남방을 복종시켰으므로(赦孟獲以服南方)” 제갈량이 살아 있는 동안 남방이 다시 반란하지 않았다고 한다.[8] 칠종칠금은 ‘공심위상(攻心爲上)’의 실천으로 이해되어 온 셈이다.

이 이야기가 정사 본문에는 없고 동진 이후의 기록에만 보이며, 봄에 출발해 가을에 끝난 짧은 원정에서 일곱 번 잡고 놓아주기가 가능했겠느냐는 점 때문에 사실성을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북송의 사마광은 《자치통감》 권70에 《한진춘추》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9]

《삼국지연의》의 칠종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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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제87회부터 제90회까지 네 회에 걸쳐 일곱 번의 사로잡음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꾸몄다. 회목만 보아도 제87회 “남만왕이 처음 사로잡히다(蠻王初受執)”, 제88회 “노수를 건너 다시 묶고(渡瀘水再縛番王)… 세 번째로 맹획을 사로잡다(三擒孟獲)”, 제89회 “남만왕이 다섯 번째로 사로잡히다(南蠻王五次遭擒)”, 제90회 “등갑을 태워 일곱 번째로 맹획을 사로잡다(燒藤甲七擒孟獲)”로 이어진다.[10] 맹획은 붙잡힐 때마다 지형이나 부하의 배신, 꾀에 넘어간 탓을 대며 승복하지 않고, 정사에는 없는 맹획의 아내 축융부인(祝融夫人), 아우 맹우(孟優), 맹수를 부리는 목록대왕(木鹿大王), 기름 먹인 등나무 갑옷을 입은 올돌골(兀突骨)의 등갑군 같은 인물과 독이 퍼진 노수 같은 장치가 더해졌다.

마지막 제90회에서 제갈량이 또 놓아주려 하자 맹획은 눈물을 흘리며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준 일은 예로부터 없었다(七擒七縱,自古未嘗有也)”고 하고, 일족과 함께 웃통을 벗고 엎드려 사죄하며(肉袒謝罪) “승상은 하늘의 위엄이시니 남쪽 사람은 다시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다.[10] 《한진춘추》의 말을 그대로 살리되 ‘七縱七擒’을 ‘七擒七縱’으로 바꾸어 썼다. 정사에서는 제갈량 자신이 한 ‘세 가지 어려움’의 말을, 연의에서는 장사(長史) 비의(費禕)가 군사를 남기지 않는 까닭을 묻고 제갈량이 답하는 장면으로 옮겼다.[10]

네 글자 성어로의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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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초 위징(魏徵)이 지은 〈이밀 묘지명(唐故邢國公李密墓誌銘)〉에는 이밀의 재능을 칭송하며 “삼령오신의 법, 칠종칠금의 공(三令五申之法,七縱七擒之功)”이라고 썼다.[11] 당대에는 이 밖에도 시승 관휴(貫休)가 남만 정벌에 나서는 사람을 보내며 지은 시 〈송인정만(送人征蠻)〉의 “칠종칠금 하던 그곳, 그대의 걸음도 그 일을 따를 만하리(七縱七擒處,君行事可攀)”, 토번을 이긴 승전 보고문 〈파토번노포(破吐蕃露布)〉 등에 쓰여 이미 굳은 말이 되었다.[12] 병법서 《삼십육계》의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縱, 잡으려면 일부러 놓아준다)’의 해설은 “무후의 칠종칠금은 놓아주고 따라가는 것”이라면서도 “무후가 놓아준 뜻은 땅을 넓히고 맹획을 빌려 여러 만족을 복종시키는 데 있었으니 병법이 아니다. 싸움을 논한다면 사로잡은 자를 다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13]

한국 문헌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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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재란 때인 1598년,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휘하에 있던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왜군이 물러간 뒤 병사들을 위로하는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는데, 여기에 “七縱七禽을 우린ᄃᆞᆯ 못ᄒᆞᆯ것가(칠종칠금을 우리인들 못하겠는가)”라는 구절이 있다.[14] 《한진춘추》의 ‘禽’ 자를 그대로 썼다.
  • 그는 경쟁사의 핵심 인력을 억지로 데려오는 대신, 몇 번이고 기회를 주며 마음을 얻는 칠종칠금의 방식을 택했다.
  • 사내 보안 정책에 반발하는 부서를 처벌로 누르기보다 이해시키고 협조를 얻는 것이 칠종칠금의 지혜이다.
  • 선배는 후배의 실수를 몇 번이고 눈감아 주며 칠종칠금하듯 마음을 얻었다.
  • 만두(饅頭)의 유래를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 대는 이야기가 있다. 북송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紀原)》은 “소설에 이르기를”이라며, 제갈량이 맹획을 칠 때 남만의 풍속에 사람 머리를 신에게 바쳐야 군사를 도와준다고 하자 양과 돼지고기를 밀가루로 싸서 사람 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제사 지낸 데서 만두가 비롯되었다고 적었다.[15] 《삼국지연의》 제91회도 칠금이 끝난 뒤 노수를 건너는 장면에 이 이야기를 넣었다.[16] 다만 《사물기원》 스스로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 맹획이 실제로는 남만의 ‘야만인 왕’이 아니라 건녕(建寧) 지역의 유력자였다는 점은 《화양국지》가 그를 촉한의 어사중승으로 기록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7]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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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금(七擒): 칠종칠금의 준말.
  • 칠금칠종(七擒七縱): 칠종칠금과 같은 말. 중국어에서 주로 쓰는 형태.
  • 욕금고종(欲擒故縱): 잡으려면 일부러 놓아줌. 《삼십육계》 제16계.
  • 공심위상(攻心爲上): 마음을 치는 것이 으뜸임. 마속의 말.
  • 이일대로(以逸待勞), 병불염사(兵不厭詐): 같은 병법 관련 성어.
  1. ↑ 1.0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칠종칠금”,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B9%A0%EC%A2%85%EC%B9%A0%EA%B8%88, 확인날짜=2026-10-03.
  2.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칠금”,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B9%A0%EA%B8%88, 확인날짜=2026-10-03.
  3. ↑ 3.0 3.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七擒七縱”,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2846, 확인날짜=2026-10-03.
  4. ↑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七縦七擒”,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4%B8%83%E7%B8%A6%E4%B8%83%E6%93%92, 확인날짜=2026-10-03.
  5. ↑ 5.0 5.1 5.2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蜀書)·제갈량전(諸葛亮傳)〉 및 배송지(裴松之) 주.
  6. ↑ 《태평어람(太平御覽)》 권322 〈병부(兵部)〉에 인용된 《한진춘추》.
  7. ↑ 7.0 7.1 상거(常璩), 《화양국지(華陽國志)》 권4 〈남중지(南中志)〉.
  8. ↑ 진수, 《삼국지》 권39 〈촉서·마량전(馬良傳)〉 배송지 주 인용 《양양기》.
  9. ↑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 권70 〈위기(魏紀) 2〉.
  10. ↑ 10.0 10.1 10.2 나관중,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87회~제90회.
  11. ↑ 위징(魏徵), 〈당고형국공이밀묘지명(唐故邢國公李密墓誌銘)〉, 《전당문(全唐文)》 권141.
  12. ↑ 관휴(貫休), 《선월집(禪月集)》 권8.
  13. ↑ 《삼십육계(三十六計)》 〈공전계(攻戰計)〉 제16계 ‘욕금고종(欲擒故縱)’.
  14. ↑ 박인로(朴仁老), 〈태평사(太平詞)〉, 《노계선생문집(蘆溪先生文集)》 권3. 창작 배경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평사(太平詞)”,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072, 확인날짜=2026-10-03.
  15. ↑ 고승(高承), 《사물기원(事物紀原)》 권9 ‘만두(饅頭)’.
  16. ↑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9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