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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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姜周龍, 1901~1932)은 1931년 평양 평원 고무 공장의 임금 삭감에 맞서 파업을 벌이다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농성하며 노동자의 처지를 호소한, 일제 강점기의 여성 노동 운동가이다.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14세 무렵 집안 형편이 기울자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옮겨 갔다. 20세에 통화현에서 최전빈과 혼인했는데, 남편은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병으로 죽었다. 이후 노부모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평양에 자리 잡아 평원 고무 공장의 직공이 되었다.[1]
1929년 세계 대공황 뒤 평양의 고무 공장주들은 원료값과 자금 부담을 임금 삭감으로 노동자에게 떠넘기려 했다. 고무 공장은 여성 노동자가 많고 고온과 유독가스 속에서 오래 일해야 하는 곳이었다.
- 파업 - 1931년 5월 16일 평원 고무 공장주가 임금 17% 삭감을 통보하자, 이튿날부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공장을 점거했다.
- 아사동맹 - 파업 12일째인 5월 28일 굶어 죽을 각오로 버티겠다는 단식 농성(아사동맹)을 결의했다.
- 강제 해산 - 5월 29일 새벽 1시 공장주가 일본 경찰을 불러 농성 노동자들을 쫓아냈다.
- 을밀대 농성 - 쫓겨난 강주룡은 광목에 돌을 매달아 지붕에 던져 평양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아침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임금 삭감이 평양 고무 노동자 전체로 번질 것이라며 그 부당함을 호소하고, 삭감을 취소하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경찰이 출동해 그를 끌어내렸다.[2]
이 일은 한국 역사에서 처음 있었던 고공 농성으로 일컬어진다. 강주룡은 경찰서에 갇힌 뒤에도 임금 삭감을 취소하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며 단식했다. 사건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공장주가 협상에 나서, 6월 중 일부 노동자가 복직하고 임금 삭감도 취소되었다고 한다.[2]
풀려난 뒤 다시 공장 앞에서 파업을 이끌다 해고되었고, 1931년 6월 9일 평양의 혁명적 노동조합(적색 노조)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붙잡혔다.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32년 6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해 8월 13일 평양 빈민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
국가보훈부는 강주룡을 1901년생으로 적어 을밀대에 오를 때 30세 무렵이었다고 보지만,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는 그때 나이를 26세로 적어 서로 다르다. 그의 이야기는 『동광』 1931년 7월호(23호)에 실린 회견 기사로 널리 알려졌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