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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총파업(元山總罷業, 1929)은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 노동 연합회 소속 노동자 2,200여 명이 벌인,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다.

1920년대 원산은 부두 노동자가 많은 항구 도시였고, 원산 노동 연합회가 지역 노동조합을 묶어 임금과 노동 조건 개선 투쟁을 이끌고 있었다. 1928년 9월 원산 근교 문평의 영국계 석유 회사 제유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일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이 감독 파면과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회사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았다.[1]

  • 문평 제유 노동자 파업 - 1929년 1월 13일 원산 노동 연합회는 최저 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단체 계약권 인정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결정했다. 부두 노동자들은 이 회사의 화물을 다루지 않기로 했다.
  • 총파업 - 일본인 자본가들의 원산 상업 회의소가 원산 노동 연합회 소속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겠다고 맞서자, 연합회는 1월 22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산하 24개 노동조합 2,200여 명이 참여했다.
  • 탄압 - 일본 경찰은 간부를 잇달아 검거하고 군대까지 시가행진을 시켰다. 회사 쪽은 다른 지방 노동자를 데려와 일을 시키고, 어용 단체 함남 노동회를 만들어 노동자를 갈라놓았다.
  • 연대 - 전국의 노동·농민·청년 단체가 성금과 식량을 보냈고, 일본·중국·프랑스·소련의 노동 단체도 격려를 보냈다.

파업 자금이 떨어지고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4월 6일 노동자들의 자유 취업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노동자 쪽의 패배였지만, 원산 노동 연합회를 없애려던 회사 쪽의 목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석 달 가까이 조직적으로 버틴 이 파업은 1920년대 노동 운동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노동 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비합법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다른 노동·농민 운동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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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동
일본인 감독의 구타를 계기로 원산 노동자 2,200여 명이 총파업 원산 총파업(1929)
노동·농민 단체를 묶은 중앙 조직, 8시간 노동제·소작료 3할 요구 조선 노농 총동맹(1924)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요구, 조선 형평사 형평 운동(1923~)
나주역 충돌을 계기로 한 학생들의 전국적 항일 시위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1. ↑ 원산총파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