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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1924~1927)은 1924년 4월 서울에서 전국의 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를 묶어 결성한 노동·농민 운동의 중앙 조직이다.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1920년 조선 노동 공제회를 시작으로 노동 단체와 소작인 단체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앙에서는 조선 노동 연맹회(화요파 쪽)와 조선 노농 대회 준비회(서울파 쪽)가 따로 전국 조직을 꾸리려다 맞서고 있었다. 지방 단체들이 분열에 반발하자 두 쪽은 통합에 합의했고, 1924년 4월 18일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인 창립총회에서 조선 노농 총동맹이 출범했다.[1] 회원 단체는 260여 개, 회원은 5만 명을 넘었다.

강령은 노농 계급의 해방과 새 사회 건설, 자본가 계급과의 투쟁, 노동자·농민의 생활 향상을 내걸었다. 창립 직후인 4월 20일 열린 임시 대회에서는 다음을 결의했다.

  • 노동 문제 - 하루 노동 시간 8시간, 임금은 최저 1원 이하로는 받지 않는다.
  • 소작 문제 - 소작료는 수확량의 3할 이내로 하고, 지세와 공과금은 지주가 낸다. 소작료 운반은 1리 이내로 한다.
  • 동양 척식 주식회사 - 동척을 통한 일본인 이민을 폐지한다.
  • 쟁의 지원 - 전국에서 늘어나던 노동 쟁의와 소작 쟁의를 지원하며 식민 통치와 지주의 수탈에 맞섰다. 1923~1924년 암태도 소작 쟁의처럼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 사회 운동과의 연대 - 기관지를 펴내고, 형평 운동을 지원했으며, 청년 운동과 손잡았다.
  • 탄압 - 일제는 집회를 거의 허가하지 않았다. 1925년 치안 유지법 시행과 조선 공산당 검거로 활동이 더 어려워졌다.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가 서로 달랐고 지도부의 사회주의 분파 다툼도 깊어졌다. 1925년 11월 중앙 집행 위원회는 노동과 농민 조직을 나누기로 결정했고, 1927년 9월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노동 운동은 1929년 원산 총파업처럼 지역 노동 연합회를 중심으로 더 조직적인 투쟁으로 나아갔다.

다른 시기의 경제 저항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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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기·주체
노동 8시간제·소작료 3할을 요구, 이후 노동·농민 총동맹으로 분리 조선 노농 총동맹(1924)
문평 제유 공장 일본인 감독의 구타를 계기로 한 최대 규모의 파업 원산 총파업(1929)
함경도·황해도 관찰사가 곡물 유출을 막음 방곡령(1889)
시전 상인이 외국 상인에 맞서 상권 수호 운동 황국 중앙 총상회(1898)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맞서 우리 손으로 개간하려 함 농광 회사(1904)
회사를 세울 때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함 회사령(1910)
  1. ↑ 조선노농총동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