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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에서 넘어옴)

간도 참변(間島慘變, 1920)은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본군이 독립군을 소탕한다며 간도(만주)에 들어가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경신년에 일어나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도 한다.

3.1 운동 뒤 만주의 독립군은 국경을 넘어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국내 진입 작전을 활발히 벌였고, 1920년 6월에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월강 추격 대대를 크게 무찔렀다. 일제는 중국 측과 함께 토벌에 나섰다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보내 독립군을 뿌리 뽑으려 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이미 깊은 산속으로 옮겨 갔고, 일본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지자 그 앙갚음으로 한인 사회 자체를 짓밟았다.[1] 일본군은 1920년 10월 중국 마적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훈춘 사건을 출병의 구실로 삼았다.[1]

  • 출병 - 조선군 제19사단의 부대가 10월 20일 무렵 두만강을 건넜고, 다른 사단의 부대도 동원되었다. 학살은 10월 초부터 12월까지 집중되었고 일본군이 간도에서 물러난 1921년 5월까지 이어졌다.[2]
  • 장암동 참변 - 10월 30일 용정 부근 화룡현 장암동에서 일본군은 기독교인 마을의 남자들을 죽이고 집과 학교, 교회를 불태웠다. 『신편 한국사』는 33명, 백과사전은 28명이 희생되었다고 적는다. 캐나다 선교사 푸트와 영국 선교사 마틴이 현장을 조사하고 사진으로 남겨 일본군의 만행을 알렸다.[2]
  • 서간도와 연해주 - 서간도에서도 중일 합동 수색과 일본군 부대에 의한 학살이 있었고, 연해주에서는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공격(4월 참변)이 일어났다.[2] 취재하러 간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은 실종되었다.[1]

피해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의 보고(1920년 10~11월) - 피살 3,469명, 체포 170명, 민가 3,209채·학교 36곳·교회 14곳 소실.[2]
  •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3,106명.
  • 월간 『독립기념관』 - 3,693명, 가옥 3,288채·학교 41곳·교회 16곳.[3]
  • 일본군 측 자료 - 494명. 실상을 크게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 기간을 합하면 1만 명 가까이 희생되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2]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은 북만주 밀산으로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만들고 러시아 자유시로 옮겼다가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3]

비슷한 이름의 참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간도 참변 1920~1921 청산리 전투 뒤 일본군의 간도 한인 학살
자유시 참변 1921 러시아 자유시에서 독립군이 적군에게 무장 해제당하며 희생
미쓰야 협정 1925 총독부와 만주 군벌이 맺은 독립운동가 단속 협정
  1. ↑ 1.0 1.1 1.2 간도참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2.2 2.3 2.4 2) 경신참변, 『신편 한국사』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
  3. ↑ 3.0 3.1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 그리고 경신참변, 월간 『독립기념관』 2018년 5월호, 독립기념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