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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은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만주 군벌 장쭤린 측이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단속하려고 맺은 협정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독립군 활동이 활발했고,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겼다.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타격을 입은 뒤에도 1923~1925년 사이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를 세워 다시 힘을 모았다. 일제는 국경 너머의 독립군을 직접 칠 수 없자 만주를 지배하던 중국 군벌의 손을 빌리기로 했다. 중국 측 이름은 '쌍방상정취체한인판법강요(雙方商定取締韓人辦法綱要)'이며, 미쓰야 협약·삼시 협정이라고도 한다.[1]

  • 체포와 인도 - 중국 관헌이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잡아 일본 측에 넘긴다.
  • 무장 해제 - 한국인의 무기 휴대와 국내 진입을 막고, 독립운동 단체를 해산시킨다.
  • 상금 -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넘겨준 중국 관리에게 상금을 주었다. 이 때문에 중국 관헌이 한인 농민까지 독립운동가로 몰아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 독립군 위축 - 중국 군경과 일본 경찰이 함께 독립군 근거지를 습격했다. 김좌진의 신민부 본부도 1928년 이런 습격을 받았다.[2]
  • 3부 통합 운동 - 흩어진 힘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1928~1929년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한국 독립당·한국 독립군), 남만주에는 국민부(→조선 혁명당·조선 혁명군)가 세워졌다.
  • 한중 관계 악화 - 재만 한인이 중국 관헌의 압박을 받게 되어 한중 농민 사이의 갈등이 커졌고, 이는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도 이어졌다.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 흐름

편집 원본 편집
연도 사건
1920 봉오동 전투(대한 독립군), 청산리 전투(북로 군정서 등), 간도 참변
1921 자유시 참변
1923~1925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성립
1925 미쓰야 협정
1928~1929 3부 통합: 혁신 의회, 국민부
  1. ↑ 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김좌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