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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은 1921년 6월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알렉세옙스크, 지금의 스보보드니)에 모여 있던 한인 독립군 부대가 지휘권 다툼 끝에 러시아 적군과 이르쿠츠크파 계열 한인 부대의 공격을 받아 무장 해제되고 큰 희생을 치른 사건이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러시아 아무르주 수라셰프카 마을

자유시 사변·흑하 사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에서 패한 일본군은 간도의 한인 마을을 휩쓴 경신참변을 일으키며 독립군을 추격했다. 만주의 독립군은 이를 피해 북만주 밀산에 모였고, 1920년 12월 서일을 총재로 북로 군정서·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10여 개 부대를 묶은 대한 독립 군단을 만들었다. 병력은 3,500명에 이르렀으나 무기가 모자랐기 때문에, 약소민족 해방을 돕겠다고 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고 1921년 초 국경을 넘어 연해주를 거쳐 자유시로 옮겨 갔다.[1]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며 러시아로 가는 것에 반대하고 만주에 남았다.

  • 지휘권 다툼 - 자유시에는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과 가까운 대한 의용군(사할린 의용대)과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 쪽의 고려 혁명군이 함께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 혁명군 정의회가 모든 한인 부대를 자기 지휘 아래 두려 했고, 사할린 의용대는 이를 거부했다.
  • 일본의 압력 - 시베리아에 출병해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던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이 요구한 독립군 무장 해제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 공격 - 6월 28일 고려 혁명군과 러시아 적군이 사할린 의용대가 머물던 수라셰프카를 포위해 공격했다. 지휘권 이양을 거부한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함께 무장 해제되었다.[2]

희생자 수는 기록마다 크게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망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고 쓴다.[1] 우리역사넷은 사망 36명·포로 864명·행방불명 59명이라는 기록과 사망 272명·익사 31명·행방불명 250명·포로 917명이라는 기록이 함께 전한다고 밝힌다.[2] 날짜도 무장 해제 명령이 내려진 6월 22일을 앞세우는 글과 공격이 벌어진 6월 28일을 앞세우는 글이 있다.

대한 독립 군단은 무너졌고, 살아남은 대원들은 흩어져 만주로 돌아갔다. 만주 독립군의 무장력은 크게 줄었으며, 사회주의 세력 안의 파벌 다툼이 빚은 비극으로 평가된다.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1920년대 중반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로 다시 정비되었다.

1920년대 초 만주 독립군의 흐름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때 일
1920.6 봉오동 전투(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1920.10 청산리 전투(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 등)
1920.10~ 경신참변(일본군의 간도 한인 학살)
1920.12 밀산에서 대한 독립 군단 결성
1921.6 자유시 참변
1923~1925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성립
1925 미쓰야 협정으로 독립군 활동 위축
  1. ↑ 1.0 1.1 자유시사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자유시 참변, 교과서 용어 해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