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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위원부(歐美委員部, 1919~1928)는 1919년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기관으로,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알리는 활동을 맡았다.

1921년 구미 위원부가 임시정부에 보낸 문서

정식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 위원부이다. 1919년 5월 이승만은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열어 대미 외교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여러 임시 정부가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뽑히자, 파리의 주파리 위원부와 필라델피아의 대한민국 통신부를 합쳐 구미 위원부를 만들었다. 초대 위원장은 김규식이었다.[1]

  • 여론 외교 - 강화 회의에서 독립을 얻기 어렵게 되자 미국 시민을 상대로 일제의 학정과 3.1 운동 때의 만행을 알리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책자를 펴내고 강연회·연설회를 열었다.
  • 미국 의회 - 한국 독립 문제가 미국 의회에 네 차례 의제로 올라 논의되었다.
  • 한국 친우회 - 미국 지도층 인사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을 돕는 한국 친우회가 만들어졌다.
  • 워싱턴 회의(1921) - 태평양 회의(워싱턴 회의)에 한국 문제를 올리려 외교 활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1]
  • 독립 공채 - 미주 한인에게 공채를 팔고 성금을 모아 임시정부 외교 자금을 마련했다.

임시정부와의 갈등과 폐지

편집 원본 편집

구미 위원부는 국무 회의나 외무총장의 인준 없이 이승만이 임의로 설치한 기관이었고, 외교 사무를 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처리했다. 상하이의 외무부는 구미 쪽 외교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외교 업무를 이어 가자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10일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이 계속 유지하다가 1928년 재정난으로 완전히 문을 닫았다.[2]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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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때 주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냄 1919년 신한청년당, 뒤에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구미 위원부 설치 1919년 이승만(워싱턴)
한국 문제를 워싱턴 회의에 올리려 함 1921년 구미 위원부
연통제·교통국 운영 1919년 임시정부 내무부·교통부(국내 연락망)
『한일 관계 사료집』 편찬 1919년 임시 사료 편찬회(국제 연맹 제출용)
  1. ↑ 1.0 1.1 구미위원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한민족독립운동사』 7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