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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광복 뒤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해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3·15 부정 선거로 일어난 4·19 혁명으로 물러난 정치인이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호는 우남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미국에 머물며 외교 활동으로 독립을 꾀했다. 광복 뒤 강한 반공 노선을 내세워 남한 정부 수립을 이끌었고, 제1·2·3대 대통령을 지내는 동안 두 차례 개헌으로 장기 집권을 꾀했다.[1]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편집 원본 편집
  • 독립 협회 시기 - 배재 학당에서 협성회를 이끌고 『협성회회보』를 펴냈으며, 독립 협회의 만민 공동회에서 활동했다. 1899년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까지 한성 감옥에 갇혔고, 옥중에서 『독립정신』을 썼다.
  • 미국 활동 - 출옥 뒤 미국에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교육·언론 활동을 했다. 무장 투쟁을 주장한 박용만(대조선 국민군단)과 대립했다.
  • 위임 통치 청원 - 1919년 2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두자는 청원서를 냈다.
  • 임시정부 대통령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한성 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이 되었고,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두었다. 위임 통치 청원과 임시정부를 비운 문제로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 탄핵되어 물러났다.
  •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 1945년 10월 귀국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만들었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뒤에는 반탁 운동에 앞장섰다.
  • 정읍 발언(1946)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휴회한 뒤인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쪽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해야 한다"며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 초대 대통령 - 19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의 의장이 되었고, 7월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뽑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 정부 수립 초기 -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반민 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꾸려졌으나 정부의 비협조로 성과 없이 해체되었다. 1949년 농지 개혁법을 만들어 유상 매수·유상 분배 방식의 농지 개혁을 추진했다.
  • 6·25 전쟁 - 1950년 1월 미국이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뺀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고, 6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 1953년 반공 포로를 석방했고, 정전 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었다.
  • 발췌 개헌(1952) - 피란 수도 부산에 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재선되었다.
  • 사사오입 개헌(1954) -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을 사사오입 논리로 통과시켜 3선에 성공했다. 표결과 번복 경위는 사사오입 개헌 문서에 있다.
  • 독재 강화 - 1958년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1959년 7월 처형했고(진보당 사건), 국가 보안법을 개정했으며, 1959년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 하야 -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1965년 그곳에서 죽었다. 부정 선거의 수법은 3.15 부정 선거 문서에 있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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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이승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