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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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1918)은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여운형·김철·서병호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보내 독립을 청원하고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한청년단이라고도 한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자, 상하이의 한인 청년들은 이를 독립의 기회로 보았다. 윌슨의 특사 크레인이 상하이에 와서 약소민족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보내 호소하라고 연설하자, 여운형은 그를 만나 한국 대표의 파견을 의논하고 장덕수·조동호 등과 독립 청원서를 영문으로 써서 보냈다. 단강으로 대한 독립·사회 개조·세계 대동을 내걸었고, 기관지 『신한청년보』를 펴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크레인이 상하이에 온 때를 1918년 12월 15일 무렵으로, 공훈전자사료관은 11월로 적는다.[1]
- 파리 대표 파견 - 외교에 밝은 김규식을 대표로 정했다. 공훈전자사료관은 신한청년당이 1918년 11월 28일 김규식을 대표로 임명했다고 적는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닿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자 외무총장 겸 파리 위원으로 활동하며 5월 12일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강화 회의에 냈다. 열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 국내외 밀사 - 여운형을 러시아령 연해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보냈다. 장덕수는 도쿄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북돋웠고, 선우혁은 평안도의 기독교인과 손잡아 3.1 운동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 임시정부 수립 - 1919년 4월 초 핵심 당원 30여 명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독립 임시 사무소를 열었고, 이것이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 이후 당원 대부분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