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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단(大報壇)은 1704년(숙종 30)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명의 신종(만력제)을 제사하려고 창덕궁 후원에 쌓은 제단이다.

1704년은 명이 망한 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1월 숙종이 신종의 사당을 세우자고 제안했고, 신하들은 청의 의심을 사고 종묘와 격식이 겹친다는 문제를 들어 논의를 거듭했다. 결국 영의정 이여의 제안에 따라 건물이 있는 사당 대신, 신위를 늘 모셔 두지 않고 제사 때만 차리는 단(壇)으로 짓기로 했다. 그해 겨울 공사를 마쳤고 예문관이 '대보단'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다.[1][2]

  • 규모 - 한 변 150척(약 45m)의 네모난 터 안에 한 변 25척, 높이 5척의 단을 쌓고 네 개의 계단을 두었다. 공사에는 주로 5군영의 군졸이 동원되었다.[2]
  • 제사 - 해마다 2월 상순에 날을 골라 지냈고, 왕이 직접 제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팔일무를 추고 문묘의 악장을 썼으며, 위패에는 '대명'이라는 국호를 밝혔다.[2]
  • 제사 대상의 확대 - 처음에는 신종만 모셨으나 뒤에 명을 세운 태조(홍무제)와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까지 세 황제를 모시는 제단이 되었다.[1]
  • 중단 - 1884년 갑신정변 뒤로 제사가 끊겼다.[2]

대보단은 명이 망한 뒤에도 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조선이 중화 문명을 잇는다는 뜻을 드러낸 상징이었다. 청에 항복한 치욕을 기억하고 대의명분을 지키려는 조선 후기 지배층의 소중화 의식을 가장 잘 보여 준다. 한 해 앞선 1703년에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 신종·의종을 모신 만동묘를 세웠다.[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옛 내빙고 터에 9월 25일 공사를 시작해 12월 24일 마쳤다고 적고, 『한국문화사』는 옛 별영대 터에 10월 3일 공사를 시작해 12월 21일 마쳤다고 적는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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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원본 편집
시설 세운 때·사람 곳
대보단 1704년, 숙종 창덕궁 후원(나라의 제단)
만동묘 1703년, 권상하(송시열의 유언) 괴산 화양동(민간 사당)
  1. ↑ 1.0 1.1 1.2 1.3 대보단의 상징성, 『한국문화사』 7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2.4 대보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