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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萬東廟)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제자 권상하가 1703년(숙종 29) 충청도 괴산 화양동에 세운,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 신종과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이다.

괴산 화양동의 만동묘

병자호란 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송시열은 명 의종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화양동 절벽에 새기는 등 명을 기리는 일에 힘썼다. 1689년(숙종 15) 사약을 받게 되자 그는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라는 유언을 제자 권상하에게 남겼다. 권상하는 1703년 민정중 등과 함께 근처 유생들의 도움을 얻어 만동묘를 세웠다. 이름은 선조의 어필 '만절필동(萬折必東, 황하가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의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땄다.[1]

  • 국가의 지원 - 영조 때 제사용 토지와 노비를 받고 면세전 20결을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며 어필로 현판을 내렸고, 1844년(헌종 10)부터는 관찰사가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 폐단 -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 서원과 함께 노론의 근거지가 되었다. 유생들이 모여 위세를 부렸고, 화양동 서원이 멋대로 발행한 화양묵패는 누구도 어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 철폐(1865) -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굳힌 1865년(고종 2) 3월 만동묘를 없앴다. 서울의 대보단에서 명 황제를 제사하니 따로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위패와 현판을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겼다. 전국 유림이 거세게 반발했다.[2]
  • 복구(1874) -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자 이항로·최익현·송근수·송병선 등 유림이 상소를 올려 만동묘 복구를 건의했고, 이듬해 1874년(고종 11) 왕명으로 다시 세워졌다.
  • 소멸 - 1907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며 부속 건물을 불태웠고, 이듬해 통감부가 만동묘를 없앴다. 1942년 건물이 헐렸으며, 지금은 터와 묘정비가 남아 있다.[1]

명을 기린 시설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시설 세운 때 성격
만동묘 1703년, 송시열 유언·권상하 사람(私人)이 세운 사당, 화양동
대보단 1704년(숙종 30) 나라에서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제단 (→ 소중화 의식)
백운동 서원 1543년(중종 38), 주세붕 안향을 모신 최초의 서원 (→ 서원, 안향)
  1. ↑ 1.0 1.1 만동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신편 한국사』 37,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