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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교린(事大交隣)은 조선이 명(뒤에는 청)을 큰 나라로 섬기는 사대와, 일본·여진·유구 등 이웃 나라·세력과 대등하게 사귀는 교린을 아울러 펼친 대외 관계의 틀이다.

사대는 중국과의 관계를, 교린은 중국 밖의 나라와의 관계를 가리킨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대표하는 말이지만 정해진 규정이나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시대와 국제 정세에 따라 모습이 달랐다. 대마도주나 여진 추장은 중국 황제에게 국왕으로 책봉받지 못해 원칙적으로 조선 국왕과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으나, 실제로는 여러 형태로 교섭했고 조선은 이를 교린으로 이해했다. 여진을 교린 상대에 넣을지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갈린다.[1]

사대 - 명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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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에 해마다 정기 사절을 보내고 예물(방물)을 바쳤다. 사대는 왕권의 안정과 문물 교류, 공무역의 통로이기도 했다.

  • 정기 사절(1년 3사) - 새해를 축하하는 하정사(정조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를 보냈다. 뒤에 동짓날에 보내는 동지사가 더해졌다. 천추사는 황태자가 있어야 보낼 수 있어 황태자가 없던 때에는 하정사·성절사만 갔다.[2][3]
  • 비정기 사절 - 감사를 표하는 사은사, 특별한 청을 하는 주청사, 새 황제 즉위 등을 축하하는 진하사, 조선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 등을 그때그때 보냈다. 태조부터 성종 때까지 비정기 사절만 344차례로, 해마다 평균 3번이 넘었고 세종 때가 가장 많았다.[2]
  • 사절단 - 정사·부사·서장관과 통역을 맡은 역관, 군관·의원 등 정관에 종인을 더해 70명 안팎이었다.[2]
  • 청 때 - 병자호란 뒤 청에 사대하게 되었고, 1645년(인조 23)부터 정기 사행을 하나로 합쳐 해마다 동지 무렵 보냈다(삼절겸연공사, 줄여 동지사).[3][4]

교린 - 일본·여진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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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 왜구를 대마도 정벌(1419)로 누르는 한편, 3포를 열고 계해약조(1443)로 세견선과 무역량을 정했다. 한양에는 일본 사신이 머무는 동평관을 두어 정해진 공무역만 허락했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5] 조선 후기에는 왜관과 통신사가 교류를 이었다.
  • 여진 - 4군 6진을 개척해 영토를 넓히면서도 귀순을 받아들이고 관직을 주었다. 국경에 무역소를 열고 한양에 북평관을 두어 사신을 맞았다(→ 여진).

조선의 대외 정책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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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상대 때
하정사·성절사·천추사 파견 명 조선 전기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무역 허용 일본 조선 전기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 파견 청의 요청(러시아 상대) 효종
백두산정계비로 국경 획정 청 숙종
결혼도감을 두어 공녀를 보냄 원 고려 원 간섭기
  1. ↑ 사대교린, 교과서 용어 해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조선사절의 왕래, 『신편 한국사』 22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3.0 3.1 천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4. ↑ 성절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5. ↑ 동평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