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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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 의식(小中華意識)은 조선이 중화 문명에 버금가는 문화를 지녔다는 자부심으로, 특히 1644년 명이 멸망한 뒤에는 오랑캐인 청 대신 조선이 중화 문명을 이은 유일한 나라라는 의식으로 강해져 조선 후기 사상과 대외관의 주류가 되었다.
'소중화'는 본래 중국이 한반도 나라의 높은 문화 수준을 평가하며 쓴 말이다. 조선은 건국 뒤 명 중심의 중화 질서를 받아들였고, 조선 전기의 소중화는 '중국 다음가는 문명국'이라는 뜻이 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과 명·청 교체를 겪은 뒤 사정이 바뀌었다. 조선은 오랑캐로 여기던 청에 사대해야 했고, 명이 망하자 중화의 적통은 조선이 잇는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었다. 일부 연구자는 이를 조선 중화 의식이라 부른다.[1]
- 이론화 -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이 체계화했다. 그는 조선이 명의 적통을 잇는 '화(華)'의 수호자이며 청을 치는 것이 춘추대의라고 주장했다.
- 북벌론 - 대명 의리론, 청에 대한 복수를 내건 북벌론, 문화 자존 의식이 한데 묶여 있었다(→ 효종 (조선)).
- 학파별 입장 - 노론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소론도 대체로 동조했다. 남인은 북벌론에 소극적이었다.[2]
- 대보단 - 1704년(숙종 30) 창덕궁 후원에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 신종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세웠다. 뒤에 명 태조와 마지막 황제 의종도 함께 모셨다. 대보단은 대의명분론과 소중화 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이었다.[3]
- 만동묘 -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제자 권상하가 1703년 충청도 화양동에 명 신종과 의종의 사당인 만동묘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