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불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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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불습유(道不拾遺)는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가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법이 엄하게 서서 백성이 죄를 짓지 않거나 인심이 순박하여 세상이 잘 다스려진 모습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노불습유(路不拾遺)라고도 한다.[2]
누가 길에 물건을 흘려도 다른 사람이 줍지 않고 그대로 두어 주인이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질서가 잡힌 사회를 말한다. 어떤 고을이나 나라의 다스림을 칭송할 때, 또는 치안이 매우 좋은 곳을 묘사할 때 쓴다. 흔히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는 야불폐호(夜不閉戶)와 짝지어 쓴다.[3]
같은 말이 옛 문헌에서 두 가지 정치 이야기에 함께 쓰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나는 상앙(商鞅)처럼 법을 엄격하게 시행해 백성이 감히 남의 물건에 손대지 못하게 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나 정(鄭)나라 자산(子産)처럼 덕으로 다스려 인심이 순해진 경우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에 “형벌이 준엄하여”와 “민심이 순후함”이 함께 들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1]
오늘날 중국어에서는 길 로(路) 자를 쓴 路不拾遺(lù bù shí yí)가 표준 형태이고, 《성어전》은 道不拾遺를 그 원래 형태로 소개한다.[3] 일본어에서는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道に遺を拾わず)”는 훈독 형태로 쓴다.[4]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전국 시대부터 한나라 때까지 여러 문헌이 잘 다스려진 세상을 그릴 때 되풀이해 쓴 표현이다. 출전으로 드는 책이 사전마다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한비자》 〈외저설 좌상〉을,[1] 《성어전》은 《전국책》 〈진책 1〉을 든다.[3]
《한비자(韓非子)》에는 두 번 나온다.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에서는 정나라 재상 자산이 다스린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5]
子産退而爲政五年,國無盜賊,道不拾遺,桃棗蔭於街者莫有援也,錐刀遺道三日可反。三年不變,民無飢也。
“자산이 물러나 정사를 편 지 다섯 해가 되자 나라에 도둑이 없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으며, 거리에 그늘을 드리운 복숭아·대추나무 열매를 따 가는 사람이 없었고, 송곳이나 칼을 길에 떨어뜨려도 사흘 뒤에 되찾을 수 있었다. 세 해 동안 흉년이 들어도 백성이 굶주리지 않았다.”
〈내저설 하(內儲說下)〉에는 “중니(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하자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으니, 제나라 경공이 이를 걱정했다(仲尼爲政於魯,道不拾遺,齊景公患之)”는 대목이 있다. 이웃 나라가 강해질 것을 두려워한 제나라가 노나라 군주에게 여악(女樂)을 보내 정사를 게을리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6]
《전국책(戰國策)》 〈진책 1(秦策一)〉은 상앙이 진나라를 다스린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7]
商君治秦,法令至行,公平無私,罰不諱強大,賞不私親近,法及太子,黥劓其傅。期年之後,道不拾遺,民不妄取,兵革大強,諸侯畏懼。然刻深寡恩,特以強服之耳。
“상군이 진나라를 다스리니 법령이 철저히 시행되고 공평무사하여, 벌은 강한 자라고 피하지 않고 상은 가까운 자라고 사사로이 주지 않았다. 법이 태자에게까지 미쳐 그 스승의 얼굴에 먹을 새기고 코를 베었다. 한 해가 지나자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고 백성이 함부로 가지지 않았으며, 군대가 크게 강해져 제후들이 두려워했다. 그러나 각박하고 은혜가 적어 오직 힘으로 복종시켰을 뿐이다.”
《사기(史記)》 〈상군 열전(商君列傳)〉에도 “시행한 지 십 년이 되자 진나라 백성이 크게 기뻐하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으며 산에는 도적이 없고 집집마다 넉넉했다(行之十年,秦民大說,道不拾遺,山無盜賊,家給人足)”는 비슷한 문장이 있다.[8]
- 《사기》 〈순리 열전(循吏列傳)〉은 자산이 재상이 된 지 “세 해 만에 문을 밤에 잠그지 않았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三年,門不夜關,道不拾遺)”고 적었다.[9]
- 《사기》 〈공자 세가(孔子世家)〉는 공자가 노나라 국정에 참여한 지 석 달 만에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塗不拾遺)”고 하여 길 도(塗) 자를 썼다.[3]
- 《사기》 〈혹리 열전(酷吏列傳)〉에서는 의종(義縱)이 하내도위로 가서 토호를 멸족하자 “하내에서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河內道不拾遺)”고 하여, 가혹한 관리의 치적을 말할 때도 같은 표현을 썼다.[10]
- 전한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선성(先醒)〉에는 초 장왕이 다스린 뒤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路不拾遺)”고 하여 路 자를 쓴 형태가 보인다.[3] 《공자가어(孔子家語)》 〈상로(相魯)〉에는 “路無拾遺”로 나온다.[3]
-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道不拾遺’가 9건, ‘路不拾遺’가 5건 나온다.[11] 1428년(세종 10)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기자묘비〉는 기자(箕子)가 조선 사람을 가르쳐 “그 교화가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其化至於道不拾遺)”고 썼다.[12]
- 고려 말 이색(李穡)도 승려를 떠나보내는 글에서 “바깥문을 닫지 않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外戶不閉。道不拾遺)”는 말로 태평한 세상을 그렸다.[13]
- 일본에서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고교쿠(皇極) 천황 원년(642) 정월 조에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두려워하여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국어대사전》이 이를 첫 용례로 든다.[4]
- 그 시절 마을은 도불습유라 할 만큼 인심이 순박해서, 장날 길에 떨어진 지갑도 주인에게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 무인 매장이 늘면서 “도불습유의 사회가 아니면 이런 가게는 버티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 감시 카메라와 처벌로 만든 질서를 도불습유라 부를 수 있는지는, 상앙과 공자의 이야기가 같은 말을 쓴 데서도 보듯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 같은 장면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전국책》은 상앙의 치적을 도불습유로 적으면서도 바로 뒤에 “각박하고 은혜가 적어 힘으로 복종시켰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북송의 소식(蘇軾)도 《동파지림(東坡志林)》의 〈사마천 이대죄(司馬遷二大罪)〉에서 《사기》의 이 대목을 들어 상앙을 비판했다.[14]
- ↑ 1.0 1.1 1.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도불습유”,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F%84%EB%B6%88%EC%8A%B5%EC%9C%A0, 확인날짜=2026-10-10.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노불습유”,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5%B8%EB%B6%88%EC%8A%B5%EC%9C%A0, 확인날짜=2026-10-10.
- ↑ 3.0 3.1 3.2 3.3 3.4 3.5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路不拾遺”,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139, 확인날짜=2026-10-10.
- ↑ 4.0 4.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道に遺を拾わず”,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9%81%93%E3%81%AB%E9%81%BA%E3%82%92%E6%8B%BE%E3%82%8F%E3%81%9A, 확인날짜=2026-10-10.
- ↑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
- ↑ 《한비자(韓非子)》 〈내저설 하(內儲說下)〉.
- ↑ 《전국책(戰國策)》 〈진책 1(秦策一)〉.
- ↑ 사마천, 《사기(史記)》 권68 〈상군 열전(商君列傳)〉.
- ↑ 사마천, 《사기》 권119 〈순리 열전(循吏列傳)〉.
- ↑ 사마천, 《사기》 권122 〈혹리 열전(酷吏列傳)〉.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道不拾遺”·“路不拾遺”,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10.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4월 29일 신사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1004029_003, 확인날짜=2026-10-10.
- ↑ 이색(李穡), 〈송자상인서(送玆上人序)〉, 《목은고(牧隱藁)》,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원문 검색 “道不拾遺”,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10.
- ↑ 소식(蘇軾), 《동파지림(東坡志林)》 권5 〈사마천 이대죄(司馬遷二大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