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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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東萊城戰鬪, 1592)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 부사 송상현이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동래성을 지키다 함락된 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제1번대가 부산 앞바다에 이르렀고, 14일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성을 지키다 전사했다. 부산진을 무너뜨린 일본군 약 2만 명은 15일 동래성을 에워쌌다. 동래성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던 읍성이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 왔다가 성 밖으로 물러나 버렸고, 경상 좌수사 박홍도 수영을 버리고 달아나 동래성은 외롭게 싸웠다.[1]
- 전사이 가도난 - 일본군이 남문 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팻말을 세우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써서 답했다.
- 함락 - 군사와 백성이 항전했으나 병력 차이가 커서 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은 채 죽음을 맞았다.
- 적장의 예우 - 일본 장수 소 요시토시 등이 그의 충절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고 전한다.[2]
- 부산진성 공격 날짜를 백과사전과 『신편 한국사』는 14일로 적는다. 『선조실록』은 13일 기사에 부산진과 동래의 함락을 한꺼번에 기록했다.
동래성을 차지한 일본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서울로 올라갔다. 고니시의 부대가 지나는 길목에서 4월 28일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크게 패했고,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피란했다(→ 임진왜란). 송상현은 뒤에 이조 판서·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 충렬을 받았으며, 부산 충렬사에 모셔졌다. 1760년(영조 36) 동래 출신 화가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는 이 전투를 기록한 그림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전투 | 때 | 인물·특징 |
|---|---|---|
| 부산진성 전투 | 1592.4.14 | 정발 전사 |
| 동래성 전투 | 1592.4.15 | 송상현,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
| 탄금대 전투 | 1592.4.28 | 신립이 배수의 진을 치고 패배(충주) |
| 한산도 대첩 | 1592.7 | 이순신, 학익진 |
| 진주성 전투 | 1592.10 | 김시민 |
- ↑ 왜란의 발발과 경과, 『신편 한국사』 29,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 ↑ 송상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