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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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 4월부터 1598년(선조 31) 11월까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첫 침략은 임진년(1592)에, 두 번째 침략은 정유년(1597)에 일어나 두 번째를 따로 정유재란이라 부르지만,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한다.[1] 조선이 명나라의 지원군과 함께 싸운 동아시아 국제전이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두 달 만에 평양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잡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명나라 군대가 들어오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1593년 이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이 4년 가까이 이어졌으나 결렬되었고, 1597년 일본은 다시 침략했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했고, 같은 해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노량 해전을 끝으로 7년 전쟁이 끝났다.
전쟁으로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사람과 문화재를 잃었으며, 이후 군사·재정·신분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 한국사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묶어 '양란'이라 부르고 흔히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약해져 에도 막부가 들어섰고, 명나라는 국력을 크게 소모해 만주의 여진이 성장할 틈을 주었다.[1]
임진년에 일어난 왜(倭)의 난리라는 뜻에서 임진왜란이라 하고, 정유년의 두 번째 침입은 정유재란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명나라 만력제의 연호를 붙여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 부른다.[1] 이 밖에 전쟁의 당사국을 드러내는 '조일전쟁', 연도만 붙인 '임진전쟁', 7년 동안 이어졌다는 뜻의 '7년 전쟁' 같은 이름도 쓰인다.
조선은 건국 후 200년 가까이 큰 전쟁을 겪지 않았다. 『선조실록』은 개전 당시를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고 적었다.[2] 연산군 이후 명종 대까지 이어진 네 차례 사화와 훈구·사림의 갈등, 선조 즉위 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붕당 대립으로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의 방어 체제도 무너져 있었다. 국방 문제를 의논하던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기구로 만들어졌고, 1555년 을묘왜변 뒤 정식 상설 관청이 되었지만 큰 전쟁에 대비하기에는 부족했다.[3] 이이(李珥)가 남쪽의 왜와 북쪽의 여진에 대비해 군사 10만을 길러야 한다고 건의한 일(십만 양병설)이 알려져 있으나, 재정이 어려워 실행되지 못했다.[1]
히데요시는 대마도(쓰시마) 도주에게 조선 국왕이 일본에 입조(入朝)하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대마도 측은 이를 감추고 조선에 통신사 파견만 요청했다. 조선은 오랫동안 결정을 미루다가 1589년 통신사를 보내기로 하고 정사 황윤길(서인), 부사 김성일(동인), 서장관 허성을 뽑았다.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떠나 11월에야 히데요시를 만났다.[1] 히데요시의 답서에는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으로 들어가겠다", "귀국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었다. 김성일은 문구를 고치라고 거듭 요구했지만 '전하'를 '합하'로 쓴 것 같은 몇 글자만 고쳐 받았다.[4]
1591년 3월 돌아온 통신사의 보고는 엇갈렸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히데요시는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다"고 했고, 김성일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다며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 했다. 류성룡이 왜 다르게 말하느냐고 묻자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5] 조정은 결국 김성일의 의견에 기울어 각 도의 성 쌓기 같은 방비를 늦추었고, 왜관의 일본인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서둘러 대비에 나섰다.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리한다.[1]
날짜는 조선 사료의 음력이다. 사료와 연구에 따라 하루 이틀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 날짜 | 사건 |
|---|---|
| 1592년 4월 13~15일 | 일본군 제1번대가 부산 앞바다에 도착, 부산진성(14일)·동래성(15일) 함락 |
| 1592년 4월 28일 | 충주 탄금대 전투, 신립 패사 |
| 1592년 4월 30일 | 선조, 한양을 떠나 서쪽으로 피란(파천) |
| 1592년 5월 2~3일 | 일본군 한양 점령 |
| 1592년 5월 7일 | 옥포 해전, 조선 수군의 첫 승리 |
| 1592년 6월 | 일본군 평양 점령, 선조는 의주로 이동 |
| 1592년 7월 8일 | 한산도 대첩, 이치 전투 |
| 1592년 10월 | 제1차 진주성 전투(진주 대첩) |
| 1593년 1월 | 조명 연합군 평양성 탈환(1월 8일 전후), 벽제관 전투(1월 27일) |
| 1593년 2월 12일 | 행주 대첩 |
| 1593년 6월 |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 함락 |
| 1596년 9월 | 명의 책봉사가 히데요시를 만나면서 강화 교섭 결렬 |
| 1597년 1월 | 일본군 재침(정유재란) |
| 1597년 7월 15~16일 | 칠천량 해전, 원균 패사 |
| 1597년 8월 | 남원성·황석산성 함락, 전주 점령 |
| 1597년 9월 7일 | 직산 전투 |
| 1597년 9월 16일 | 명량 해전 |
| 1598년 8월 18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 1598년 11월 19일 |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 일본군 철수 완료 |
히데요시는 육군 정규 병력 15만 8,700명을 9개 번대(番隊)로 나누고, 수군 9,000명과 후방 경비 병력 1만 2,000명 등을 더해 2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냈다. 제1번대는 고니시 유키나가, 제2번대는 가토 기요마사, 제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끌었다.[1] 1592년 4월 13일 고니시의 선단이 부산 앞바다에 이르렀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 조공하러 오는 왜선으로 여겨 대비하지 못했고,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했다.[2] 동래성을 에워싼 일본군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팻말을 세우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써서 답했다고 한다. 동래성은 15일 함락되었고 송상현은 조복을 입고 앉은 채 죽었다.[7] 전투의 경과는 동래성 전투 문서에 있다.
일본군은 중로(고니시), 좌로(가토), 우로(구로다)의 세 갈래로 북상했다.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내려보냈으나 군사가 모이지 않아 이일은 상주에서 급히 모은 농민 수백 명을 데리고 싸우다 패했다. 이어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 8,000여 명을 모았다. 종사관 김여물 등은 험한 조령에서 막자고 했지만 신립은 기병을 쓸 수 있는 평지에서 싸워야 한다며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고, 4월 28일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에게 크게 패해 강물에 몸을 던졌다.[8]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피란을 결정하고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로 세웠다.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을 모으게 했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종일 쏟아지는 비 속에 도성을 떠났고, 따르는 종친과 문무관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9] 선조가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로 옮겨 가는 동안, 일본군은 5월 2일(고니시)과 3일(가토) 한양에 들어왔다. 도성의 궁궐이 불탄 경위는 기록이 갈려 지금도 견해가 나뉜다. 『선조수정실록』은 왕이 떠나자 백성들이 노비 문서를 맡은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지르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모두 불탔다고 적었지만, 고니시 부대를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기 『서정일기』(西征日記)에는 5월 7일에 경복궁이 전소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군이 불태웠다는 해석도 나온다.[1]
일본군은 임진강 방어선을 무너뜨린 뒤 다시 갈라졌다. 고니시는 6월 평양을 점령했고, 가토는 함경도로 들어가 반민(叛民)에게 붙잡혀 넘겨진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삼았으며, 구로다는 황해도를 휩쓸었다.[1] 개전 두 달 만에 조선은 평안도 북부와 전라도 일부를 빼고 대부분의 땅을 잃었다.
전쟁 직전 조선은 판옥선(板屋船) 250여 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은 1555년 무렵 개발된 2층 구조의 전선으로, 아래층에서 노를 젓고 위층에서 싸웠다.[10] 그러나 개전 초 경상좌수사 박홍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도 거의 무너져, 수군의 주력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되었다.[1]
이순신은 1592년 5월 4일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여수 본영을 나섰다. 5월 7일 옥포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왜선 26척을 깨뜨려 해전 첫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합포에서 5척, 이튿날 적진포에서 11척을 불태웠다.[11] 5월 29일부터 시작한 2차 출동에서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이겼는데, 사천 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 쓰였다.[1]
7월 8일 이순신·이억기·원균의 연합 함대 55척은 견내량에 머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낸 뒤 학익진(鶴翼陣)으로 에워싸 47척을 깨뜨리고 12척을 사로잡았다(한산도 대첩). 7월 10일에는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를 무찔렀다.[12] 이로써 일본은 서해를 돌아 육군에 물자를 대려던 수륙병진(水陸竝進) 계획이 막혔다. 9월 1일에는 일본 수군의 본거지 부산포를 공격해 정박해 있던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을 불태웠으나, 녹도만호 정운 등 6명이 전사했다.[13]
관군이 무너지자 1592년 여름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대개 전직 관원과 유생이었고, 의병은 양반부터 천민까지 다양한 신분으로 이루어졌다. 1593년 1월 조선이 명나라 진영에 알린 의병 수는 관군의 4분의 1인 2만 2,600여 명이었는데, 이는 관군이 회복되면서 의병이 해산되거나 관군에 흡수된 뒤의 숫자였다.[14]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불렸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싸우고 정암진에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전라도의 고경명은 7월 금산에서 전사했고, 충청도의 조헌은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되찾은 뒤 8월 금산에서 700명과 함께 전사했다(칠백의총). 황해도의 이정암은 연안성을 지켜 냈고, 함경도의 정문부는 가토 부대를 여러 차례 깨뜨렸다(북관 대첩).[1] 묘향산의 승려 휴정(서산대사)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군을 일으켰고, 그의 제자 사명당 유정(惟政)·처영 등이 이에 호응했다.[15]
선조는 피란길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1592년 7월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이끈 명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다. 이후 명의 심유경이 고니시와 화의를 교섭하는 사이, 명은 영하(寧夏)의 반란을 진압한 이여송을 제독으로 삼아 대군을 보냈다.[1] 1593년 1월 이여송의 명군과 조선 관군, 휴정·유정의 승군은 평양성을 포위해 칠성문·보통문·함구문을 공격했고, 고니시는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났다.[18]
이여송은 그 기세로 한양을 향해 내려가다 1월 27일 벽제관 남쪽 여석령(숫돌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등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크게 졌다. 포병이 도착하지 않은 채 기병만으로 싸운 명군은 조총에 큰 손실을 입었고, 이여송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물러났다.[19]
명군과 함께 한양을 되찾으려 북상하던 전라도관찰사 권율은 한강 가의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1593년 2월 12일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한 일본군 3만여 명이 일곱 차례로 나뉘어 공격했지만, 1만 명이 안 되는 조선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 비격진천뢰, 총통과 활, 돌을 써서 하루 종일 싸워 물리쳤다(행주 대첩). 우키타와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이 다쳤다.[16] 보급난과 전염병, 의병의 공격에 시달린 일본군은 강화 교섭에 응해 4월 18일 한양에서 물러났고, 울산 서생포에서 웅천까지 남해안에 성을 쌓고 머물렀다.[1]
교섭이 진행되던 1593년 6월 일본군은 지난해의 패배를 갚겠다며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했다. 김천일·최경회·황진 등이 끝까지 싸웠지만 성은 함락되었고 성 안의 수만 명이 죽었다.[1] 이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싸움의 하나로 꼽힌다.
명과 일본의 교섭은 처음부터 서로를 속이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명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보낼 것, 감합 무역을 되살릴 것, 조선 8도 가운데 남쪽 4도를 넘길 것, 조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이 조건으로는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히데요시가 책봉과 조공을 원한다고 거짓 보고했다. 명은 1596년 책봉사를 보내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문서와 금인을 전했으나, 1596년 9월 오사카에서 이를 받은 히데요시는 크게 노해 다시 침략을 명령했다.[1][6]
휴전기에도 군량은 명군에 먼저 돌아갔고, 굶주림이 심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기록되었다. 1594년 송유진의 난,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몽학의 난은 왕조를 뒤엎겠다고 나선 반란이었다. 이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했다.[1][20] 한편 조정은 이 시기에 군제를 다시 짰다. 1593년 8월 명 장수 낙상지에게 화포 교습을 맡긴 일을 바탕으로 훈련도감을 세웠고, 류성룡의 건의로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해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을 길렀다.[21] 1594년부터는 지방에 양인과 천인을 함께 묶은 속오군을 편성하기 시작해 1596년 말 거의 전국에 조직했다.[22]
1597년 1월 가토와 고니시가 다시 건너왔고, 3월부터 14만 1,500명의 본대가 뒤따랐다. 일본군은 첫 침략이 실패한 원인을 바다를 잡지 못한 데서 찾고, 이번에는 전라도를 먼저 장악하려 했다.[1][6] 조선 조정은 고니시의 부하 요시라가 흘린 가토의 도해 정보를 믿고 출동을 명령했다가, 이순신이 따르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그를 잡아 가두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세웠다.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한 달여 혹독한 신문을 받은 뒤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풀려나,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했다.[23]
원균은 도원수 권율의 독촉을 받고 160여 척을 이끌고 부산 쪽으로 나갔다가 7월 15~16일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모든 배를 잃었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을 이끌고 빠져나왔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진 유일한 해전이다.[24] 바다가 열리자 일본군은 8월 남원성을 함락하고(명 부총병 양원은 겨우 빠져나갔다) 황석산성을 무너뜨린 뒤 전주에 들어갔다. 이어 충청도로 올라가다 9월 7일 직산에서 명군에게 막혔다.[6]
다시 통제사에 임명된 이순신에게 남은 전선은 12척, 나중에 1척이 더해져 13척이었다. 1597년 9월 16일 그는 진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물길 명량(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3척을 맞아 31척을 깨뜨렸다(명량 해전).[25] 육지에서는 직산, 바다에서는 명량에서 북상과 서진이 막히자 일본군은 10월부터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의 왜성으로 물러났다. 조명 연합군은 1597년 말부터 1598년까지 울산 도산성, 사천, 순천 왜교성을 차례로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1][6]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일본군은 죽음을 숨긴 채 철수에 들어갔다. 순천에 갇힌 고니시는 명 수군 도독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퇴로를 열어 달라고 했고,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500여 척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 수군 200여 척은 11월 18일 밤부터 19일 아침까지 노량에서 이들을 맞아 200여 척을 깨뜨렸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26] 고니시는 그 사이 남해도 남쪽으로 빠져나갔고, 일본군은 부산에 모여 바다를 건너갔다. 명군은 1599년부터 차례로 철수해 1600년 9월 남은 병력까지 모두 돌아갔다.[1]
인명 피해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평가와 논쟁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쟁 전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줄었다고 적는다. 경작할 사람이 줄고 양안(토지 대장)이 사라진 탓에 나라가 파악하는 토지가 크게 줄었고, 이는 곧 세수 감소로 이어졌다.[1]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서적, 미술품이 불타거나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도 전주 사고만 남았는데,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유생 안의·손홍록 등이 1592년 6월 실록과 태조 어진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숨긴 덕분이었다.[27]
전쟁 중 정부는 군량을 모으려고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벼슬이나 면역, 면천(免賤)을 주는 납속(納粟)을 시행했고, 받는 사람 이름을 비워 둔 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을 발급했다. 공명첩은 전쟁 뒤에도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남발되었다.[28] 군공과 납속을 통한 서얼 허통, 노비의 면천 등으로 신분 질서가 느슨해졌다.[1]
전쟁은 조선 후기 국가 체제의 틀을 바꾸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등에서 자주 묻는 전후 개편은 다음과 같다.
| 항목 | 내용 |
|---|---|
| 비변사 기능 강화 | 전쟁 수행 최고 기관이 되어 군사뿐 아니라 수령 임명, 외교, 재정까지 맡으며 의정부를 대신하는 실질적 최고 관청이 됨(1865년 폐지)[3] |
| 훈련도감 | 1593년 설치. 급료를 받는 상비군,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 조선 후기 5군영의 첫 군영[21] |
| 속오군 | 1594년부터 편성한 지방군. 양반에서 노비까지 묶은 혼성군으로,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훈련[22] |
| 새 무기 | 이장손의 비격진천뢰(시한 폭탄), 화차, 항왜(降倭)에게서 배운 조총 제조와 화약 제조술[1][29] |
| 납속·공명첩 | 재정 보충 수단으로 시행, 신분제 동요의 계기[28] |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나라를 다시 세워 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 의식과 숭명 사상이 굳어졌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깊어졌다. 명군을 따라 관우를 섬기는 신앙이 들어와 서울 등지에 관왕묘가 세워지기도 했다.[1]
일본군은 많은 조선 사람을 끌고 갔다. 이들을 피로인(被擄人)이라 하는데,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일본 학자는 2~3만 명, 한국 학자는 10만~40만 명으로 추정한다. 전투 중에 잡히거나 노동력·기술자로 납치되었고, 노예로 팔린 경우도 있었다. 전쟁 뒤 조선은 대마도 사절과 회답겸쇄환사, 통신사 등을 통해 이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돌아온 사람은 6,000명을 넘지 않았다.[30] 1607년 첫 회답겸쇄환사가 데려온 사람이 1,418명이었고,[31] 1617년 사행 때는 230여 명이었다.[32]
끌려간 사람 가운데 도공(陶工)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다. 사가 번(나베시마 가문)에 끌려간 이삼평은 아리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 원료를 찾아 1605년 무렵 가마를 열었고, 이것이 일본 자기의 시초로 꼽힌다. 아리타·이마리 자기는 에도 시대에 일본 제일의 자기가 되어 해외로도 수출되었다.[33] 시마즈 요시히로가 데려간 80여 명은 가고시마 나에시로가와에 모여 살며 사쓰마 도자기를 만들었다.[34]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유재란 때 붙잡혀 간 강항은 교토 후시미에서 후지와라 세이카 등과 교유하며 일본 성리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35] 일본군은 금속 활자와 『퇴계집』 같은 서적도 가져갔다.[1]
무리한 원정으로 다이묘들이 힘을 소모하자 원정에 크게 나서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떠올랐다. 그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기고 1603년 에도 막부를 열었다.[1] 에도 막부는 대마도를 통해 조선에 국교 회복을 요청했고, 조선은 국서를 먼저 보낼 것, 왕릉을 파헤친 범릉적을 넘길 것, 피로인을 돌려보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일본이 이를 따르자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가 맺어졌다.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되었다.[36] 이후 조선은 회답겸쇄환사와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고, 두 나라는 19세기 후반까지 큰 충돌 없이 관계를 이어 갔다.
명은 두 차례 대군을 보내느라 재정이 크게 흔들렸다. 명과 조선이 일본군에 매달려 있는 동안 만주의 건주여진은 누르하치 아래에서 세력을 키웠고, 1616년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을 깨뜨렸고, 뒤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어 결국 명을 대신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임진왜란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했고 정묘호란·병자호란이라는 다음 시련을 예고했다고 평가한다.[1] 다만 명은 전쟁 전부터 이미 기울고 있었고 명이 멸망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644년이어서, 임진왜란을 명 멸망의 직접 원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전후의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외교를 편 것도 이런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의 인명 피해는 믿을 만한 전체 통계가 없다. 피로인 수만 해도 2~3만 명에서 40만 명까지 추정이 크게 엇갈린다.[30] 일본군은 전공의 증거로 머리 대신 조선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 갔는데, 이것을 묻은 교토의 무덤(이총, 귀무덤)에는 약 2만 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고 한다. 희생자 대부분은 비전투원이었다.[37]
병력 수도 자료마다 다르다. 이여송이 이끈 명의 2차 원군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은 4만 3,000여 명, 평양전투 항목은 5만 명으로 적는다.[1][18] 전투 날짜도 사료에 따라 하루 이틀씩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칠천량 해전은 7월 15일과 16일, 직산 전투는 9월 5일과 7일로 기록이 갈린다.[24][6]
거북선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구조를 두고 논쟁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으로 가장 자세한 것은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기사로, 배 위를 판목으로 덮어 거북 등처럼 만들고 칼과 송곳을 꽂았으며, 앞은 용머리를 만들어 입을 총구멍으로 썼다고 적었다. 형태를 그림으로 보여 주는 것은 1795년(정조 19)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 두 그림인데, 둘의 모양이 서로 다르고 전쟁 뒤 200년이 지난 배여서 임진왜란 당시와 같다고 할 수 없다.[39]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말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쓴 뒤 널리 퍼졌지만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덮개에 철판을 씌웠는지는 확인되지 않았고, 무게가 늘고 바닷물에 부식된다는 점을 들어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내부가 2층이었는지 3층이었는지, 노를 젓는 공간과 포를 쏘는 공간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도 의견이 갈린다. 『태종실록』에 1413년 '귀선'(龜船)이 나오므로 이름 자체는 조선 초부터 있었고, 임진왜란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군관들이 이를 고쳐 만든 것으로 본다.[39]
- 히데요시의 출신 이야기: 『선조실록』의 개전 기사에는 히데요시가 원래 꼴을 베어 팔던 가난뱅이였는데, 전 관백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우물에 빠진 금잔을 물을 넘치게 해 건져 내는 꾀로 총애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작은 글씨로 덧붙어 있다. 조선 조정에 전해진 소문을 적은 것이다.[2]
- 싸워 죽기는 쉬우나: 동래부사 송상현의 "戰死易 假道難"은 전쟁 초기 항전의 상징으로 전해진다. 일본 장수 소 요시토시 등이 그의 충절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 지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7]
- 행주치마: 행주 대첩 때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싸운 데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1517년 최세진의 『사성통해』와 1527년 『훈몽자회』에 이미 '행ᄌᆞ쵸마'라는 말이 보이므로, 이 말이 전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40]
- 논개: 1593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관기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구전되다가 1620년 무렵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처음 기록되었다. 진주 사람들은 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41]
- 명량의 마다시: 명량 해전 중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 투항 왜인 준사가 적선 쪽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자가 안골포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라고 외쳤고, 이순신이 그를 끌어올려 목을 베어 매달자 일본 수군의 사기가 꺾였다고 한다.[25]
-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노량에서 총탄을 맞은 이순신이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했고, 조카 이완이 대신 지휘했다고 전한다.[26][1]
- 바다 밑을 다니는 신병: 1598년 5월 선조는 명나라 유격 팽신고의 처소에서 '파랑국'(波浪國) 사람이라는 병사를 만났다. 실록은 그가 노란 눈동자에 온몸이 검고 머리카락이 곱슬이며, 바다 밑에 잠수해 적선을 공격할 수 있어 '해귀'(海鬼)라고도 불린다고 적었다. 명군에 섞여 온 아프리카계 병사로 보는 해석이 있다.[42]
-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 신부: 1593년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들어왔는데, 학계는 흔히 그를 조선에 온 첫 서양인으로 본다.[43]
- 항왜 김충선: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귀순한 사야가(沙也加)는 조선군으로 싸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뒤에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공을 세웠다.[44]
- 『징비록』: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1592~1598년의 일을 돌아보며 쓴 기록. '징비'는 『시경』의 "지난 일을 징계해 뒷날의 환란을 삼간다"는 구절에서 왔다. 국보.[45]
- 『난중일기』: 이순신이 1592년 5월 1일부터 1598년 10월 7일까지 쓴 진중 일기. 본래 이름이 없었으나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엮을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친필본은 국보이며 아산 현충사에 있다.[46]
- 『임진록』: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이순신의 해전, 명나라 구원병, 사명당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명당이 왕명으로 일본에 들어가 신통력으로 항복을 받아 내는 설화, 관운장이 조선군을 돕는 설화처럼 실제와 다른 이야기가 섞여 있으며, 이본이 60여 종에 이른다.[47]
- 『최척전』: 1621년 조위한이 쓴 한문 소설.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헤어진 최척과 옥영 부부가 각각 중국과 일본으로 떠돌다 안남(베트남)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48]
- 박종화, 『임진왜란』: 1954년 5월부터 1957년 4월까지 조선일보에 946회 연재된 장편 역사소설. 이순신·계월향·논개를 주인공으로 삼았다.[49]
| 제목 | 개봉 | 감독 | 내용 |
|---|---|---|---|
| 천군 | 2005년 7월 15일 | 민준기 | 남북한 군인들이 과거로 떨어져 28살 청년 이순신을 만나는 공상 사극[50] |
| 명량 | 2014년 7월 30일 | 김한민 | 명량 해전. 최민식이 이순신 역. 관객 1,761만 명으로 한국 영화 흥행 1위[51] |
| 대립군 | 2017년 5월 31일 | 정윤철 | 분조(分朝)를 맡은 세자 광해군(여진구)과 그를 호위한 대립군(남의 군역을 대신 서는 사람)들[52] |
| 한산: 용의 출현 | 2022년 7월 27일 | 김한민 | 한산도 대첩. 관객 726만 명[53] |
| 노량: 죽음의 바다 | 2023년 12월 20일 | 김한민 | 노량 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김윤석이 이순신 역. 관객 457만 명[54] |
| 전, 란 | 2024년 | 김상만 | 무신 집안 외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왜란 속에 각각 왕의 호위무사와 의병이 되어 맞서는 이야기. 박찬욱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55] |
『명량』·『한산: 용의 출현』·『노량: 죽음의 바다』는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이다. 관객 수는 KOBIS 공식 통계(2026년 10월 15일 기준)이다.
-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1.29 1.30 임진왜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0 2.1 2.2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6-10-16 확인.
- ↑ 3.0 3.1 비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김성일이 왜인의 답서가 거만하다 하여 현소에게 항의하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6-10-16 확인.
- ↑ 5.0 5.1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6-10-16 확인.
- ↑ 6.0 6.1 6.2 6.3 6.4 6.5 정유재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7.0 7.1 송상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탄금대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30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6-10-16 확인.
- ↑ 판옥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옥포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12.0 12.1 한산도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부산포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16.0 16.1 행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17.0 17.1 김시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18.0 18.1 평양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벽제관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이몽학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1.0 21.1 훈련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2.0 22.1 속오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4.0 24.1 칠천량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5.0 25.1 명량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6.0 26.1 노량해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전주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28.0 28.1 공명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비격진천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30.0 30.1 피로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해사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동사상일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이삼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나에시로가와 조선인 도공마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강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기유약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조선인 이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39.0 39.1 거북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행주치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논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팽 유격 처소에 행행하여 파랑국(波浪國)인을 대면하다,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26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6-10-16 확인.
- ↑ 포르투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김충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징비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난중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임진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최척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임진왜란(박종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 ↑ 천군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명량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대립군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한산: 용의 출현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전, 란 영화 상세정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 2026-10-16 확인.
- ↑ 김명민-불멸의 이순신, 한국방송대상서 동시 수상, OSEN, 2006-07-21.
- ↑ 징비록 김상중 김태우 정도전 열풍 이를까? 관전포인트 셋, 텐아시아, 201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