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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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倭館)은 조선 시대에 일본인이 머물며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의례와 무역을 하던 곳으로, 조선 후기에는 부산에만 두었고 1678년부터 초량 왜관이 그 역할을 맡았다.
조선은 왜구를 막으면서 평화적인 교역을 허락하려고 일본인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정해 주었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의 동평관과 남해안 포구의 왜관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부산 한 곳으로 줄어 절영도, 두모포, 초량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관에 머문 사람은 대부분 대마도에서 온 일본인 남자였으며, 출입과 통행 범위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1]
- 국교 재개 - 임진왜란 뒤 1609년(광해군 1) 대마도주와 기유약조를 맺어 교역을 다시 허락했다. 세견선은 20척으로 줄었다.
- 두모포 왜관 - 1607년 무렵부터 약 70년 동안 쓰였으나 터가 좁고 배를 대기 어려워 일본 측이 옮기기를 거듭 요구했다.
- 초량 왜관 - 1675년(숙종 1) 짓기 시작해 1678년 완공했다. 약 10만 평으로 두모포 왜관의 10배쯤 되었고, 일본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 데지마보다 훨씬 컸다. 용두산을 사이에 두고 외교·무역 실무를 보는 동관과 사절이 묵는 서관으로 나뉘었다.
- 무역 - 왜관 안의 개시 대청에서 정해진 날에 공무역과 개시 무역이 열렸고, 이를 틈타 사무역인 후시도 이루어졌다. 동래의 내상이 이 교역으로 성장했다. 조선은 인삼·쌀·무명을 팔고 은·구리·유황·후추 등을 사들였으며, 청에서 들여온 비단·약재를 일본에 되파는 중계 무역도 했다.
- 통신사 - 일본 막부에 보내는 외교 사절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되었고, 대마도를 거쳐 에도까지 갔다.
-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면서 초량 왜관 자리는 일본인 거류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