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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東川王, 209~248, 재위 227~248)은 고구려의 제11대 왕으로,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위나라와 맞서다가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을 빼앗기는 위기를 겪었다.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을 기념해 세운 비의 조각 탁본(1905년 지안에서 발견)

이름은 우위거이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즉위 초에는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맞섰고, 238년 위나라가 공손씨를 칠 때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나 공손씨가 사라지자 고구려와 위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242년 동천왕은 요동과 낙랑을 잇는 길목인 서안평을 먼저 공격했다.[1]

관구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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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입 -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왕은 비류수 근처에서 처음에는 이겼으나, 적을 얕보고 깊이 들어갔다가 크게 졌다.[2]
  • 환도성 함락 -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성안 사람들을 죽였다. 장군 왕기가 왕을 뒤쫓자 왕은 남옥저를 거쳐 북옥저 쪽으로 달아났다.[3]
  • 밀우와 유유 - 동부 사람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추격군을 막았고, 유유는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고 음식 그릇에 칼을 숨겨 위나라 장수를 찔러 죽였다. 이 틈에 고구려군이 반격해 위군을 몰아냈다.[3]
  • 평양성 천도 - 환도성이 크게 부서지자 247년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국내성 근처의 임시 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1]

관구검의 원정은 고구려를 누르는 한편, 낙랑·대방군을 시켜 고구려에 딸려 있던 동예와 옥저까지 위의 영향 아래 두려는 것이었다. 이때 동예는 낙랑군에 항복했다.

엇갈리는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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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관구검의 침입과 환도성 함락을 동천왕 20년(246) 8~10월의 일로 적는다.[2] 반면 중국 쪽 기록인 『삼국지』와 관구검 기공비를 따르는 연구는 244~245년 두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본다.[1] 동천왕의 재위 끝 해도 『삼국사기』의 248년을 따르는 경우와 백과사전의 247년이 다르다.

고구려 왕의 대외 활동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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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왕
서안평 공격(242),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 함락 동천왕
서안평 점령(311), 낙랑군 축출(313) 미천왕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전사(371) 고국원왕 (→ 근초고왕)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400) 광개토 대왕
  1. ↑ 1.0 1.1 1.2 동천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246) 8월,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3.0 3.1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246) 10월, 밀우와 유유가 동천왕을 지키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