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IT 위키
더 많은 작업
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668)는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졸본에 세워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강국으로 성장한 삼국의 하나로, 수·당의 침략을 막아 냈으나 668년 나당 연합군에 멸망했다.
- 유리왕 - 3년 국내성(지린성 지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 태조왕 - 옥저를 정복하고 계루부 고씨의 왕위 세습을 굳혔다.
- 고국천왕 - 부족적 5부를 행정적 5부로 바꾸고, 왕위 부자 상속을 확립했다. 194년 을파소의 건의로 진대법을 실시했다.
- 동천왕 - 242년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을 빼앗겼다.
- 미천왕 - 311년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고, 313년 낙랑군을 몰아냈다.
- 소수림왕 - 372년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으며, 373년 율령을 반포했다.
- 광개토 대왕 - 영락이라는 연호를 쓰고, 400년 신라에 들어온 왜를 물리쳤다.
- 장수왕 -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했다.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다.
- 문자왕 - 494년 부여를 완전히 병합했다.
- 영양왕 - 612년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살수 대첩).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했다.
- 영류왕·보장왕 - 당의 침략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았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645년 안시성에서 당 태종의 군대를 막았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했다.
- 초기 관직 - 연맹 왕국 시기에는 5부 가운데 계루부에서 왕이 나왔고(처음에는 소노부), 왕 아래 상가·대로·패자·고추가 등의 관직을 두었다. 대가들도 사자·조의·선인 같은 자기 관리를 거느렸다(→ 한반도의 초기 국가).
- 관등 - 최고 관등인 대대로를 비롯해 태대형·대형 등 '형' 계열과 대사자 등 '사자' 계열, 조의·선인 등 10여 관등을 두었다. 후기에는 대대로를 귀족들이 3년마다 뽑았다.
- 제가 회의 - 대가들이 모여 나라의 중대사와 중죄인의 처벌을 결정했다.
- 지방 제도 - 6세기 중반 이후 지방의 큰 성에는 욕살, 그 아래 성에는 처려근지, 작은 성에는 루초를 두었다. 이들은 군사와 행정을 함께 맡았고 치소가 산성 안에 있는 경우가 많아, 성이 곧 지방 통치의 단위였다.[1]
- 교육 - 수도에는 국립 교육 기관인 태학을 두어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쳤고, 지방에는 경당을 두어 청소년에게 글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 풍속 - 혼인한 신랑이 신부 집 뒤에 지은 작은 집(서옥)에서 살다가 자식이 크면 돌아가는 서옥제, 10월의 제천 행사 동맹, 집집마다 둔 창고 부경이 있었다(→ 한반도의 초기 국가).
- 법 -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를 물게 하는 1책 12법이 있었다.
- 돌무지무덤 - 지안의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후기에는 벽화가 그려진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 고분 벽화 - 무용총의 수렵도·무용도, 강서대묘의 사신도, 그리고 평안남도 용강의 쌍영총이 유명하다. 쌍영총은 앞방과 널방 사이에 팔각 돌기둥 두 개가 선 무덤으로, 승려를 앞세워 공양하러 가는 귀족 부인의 행렬이 그려져 불교가 귀족 사회에 퍼졌음을 보여 준다.
-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 연가 7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불상이다.
- 광개토 대왕릉비 -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려 세웠다.
- 담징이 왜에 종이·먹 만드는 법을 전하고, 혜자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