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정계비
IT 위키
더 많은 작업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 청의 목극등이 조선과 청의 경계를 정하며 백두산 남동쪽 분수령에 세운 비석으로,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이라는 비문이 뒤에 간도 귀속 분쟁의 근거가 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압록강·두만강 너머에서 인삼을 캐거나 사냥하던 양국 백성이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1710년에는 평안도 위원에서 강을 건넌 조선인이 청나라 사람을 죽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청은 경계를 정한다는 명분과 함께 왕실의 발상지로 여기는 백두산 일대를 조사하려 했고, 1712년 2월 오라총관 목극등을 보낸다고 알려 왔다.[1]
조선은 접반사 박권과 함경 감사 이선부를 보냈으나, 목극등은 두 사람이 늙었다며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결국 군관 이의복·조태상, 역관 김경문 등 조선 관리 6명만 따라간 가운데 목극등의 뜻대로 경계가 정해졌다. 군관의 이름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태상(趙台相)으로, 우리역사넷 해설은 조대상(趙臺相)으로 적는다. 일행은 1712년 5월 15일(음력) 천지 아래 동남쪽 약 4k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2]
- 비문 - 머리에 '대청(大淸)' 두 글자를 크게 쓰고,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살피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내용과 양측 관리 이름을 새겼다.
- 토문강 해석 - 비가 선 물줄기가 정말 두만강의 수원인지,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인지를 두고 해석이 갈릴 여지가 처음부터 있었다. 조선은 토문강을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 보아 그 사이의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했고, 청은 토문을 두만강으로 보았다. 1881년 청이 간도 개척에 나서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 등을 보내 비를 조사하게 했고, 이어 안변 부사 이중하를 보내 조선 땅임을 주장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 간도 협약(1909) - 일제가 남만주 철도 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청과 간도 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 사라짐 - 비석은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난 직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