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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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 대첩(北關大捷, 1592~1593)은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길주·쌍포·백탑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을 물리쳐 함경도(관북)를 되찾은 싸움이다.
- 반역자 처단 - 9월 경성을 되찾고 국세필 일당을 베었다. 회령에서는 유생 신세준 등이 국경인을 베었고, 명천의 정말수도 처단되었다.[2]
- 장덕산(장평 석령) 싸움 - 10월 말 길주 일본군이 노략질하고 돌아가는 길을 막아 크게 이겼다. 『선조수정실록』은 눈 내리는 추운 밤을 지나 600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적었다.[3]
- 쌍포 싸움 - 12월 마천령 아래에 진을 친 일본군을 쳐서 이겼다.[3]
- 길주 포위와 백탑 싸움 - 길주성을 에워싸 땔감과 꼴을 끊었다. 1593년 1월 가토가 남쪽으로 물러나자 길주의 일본군도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고, 의병은 백탑 들판에서 퇴각하는 적을 쳤다. 이로써 관북 지방이 회복되었다.[2]
정문부는 공을 세웠으나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사실과 다르게 보고해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전한다. 뒤에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고, 나중에 억울함이 풀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1]
1708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비문을 지어 길주 주민들과 함께 북관대첩비를 세웠다(1709년으로 적는 글도 있다). 러일 전쟁 때 함경도에 들어온 일본군이 비를 빼앗아 1905년 일본으로 실어 갔고, 비는 야스쿠니 신사 등에 놓였다.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이 그 존재를 알린 뒤 반환 요구가 이어졌고, 2005년 10월 남한으로 돌아온 비는 2006년 3월 1일 개성에서 북한에 넘겨져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4]
- ↑ 1.0 1.1 정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2.0 2.1 2.2 의병의 봉기, 『신편 한국사』 29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 ↑ 3.0 3.1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0월 1일, 북도 평사 정문부가 길주의 적병을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 ↑ 오은경, 「북관대첩비 반환과 남북관계」,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학술지 게재 논문, 2026-10-19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