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북관 대첩(北關大捷, 1592~1593)은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반란 세력을 처단하고 길주·쌍포·백탑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을 물리쳐 함경도(관북)를 되찾은 싸움이다.

경복궁에 세운 북관대첩비 복제비

1592년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함경도로 밀고 올라오자,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곳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따르던 신하들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기고 항복했다. 경성에서도 국세필 등이 일본군에 붙어 고을을 다스렸다.[1]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鄭文孚, 1565~1624)는 경성 유생 지달원 등의 권유로 의병을 일으켰다. 종성 부사 정현룡, 경원 부사 오응태 등이 합세하자 군사가 1천여 명으로 불었다.[2]

  • 반역자 처단 - 9월 경성을 되찾고 국세필 일당을 베었다. 회령에서는 유생 신세준 등이 국경인을 베었고, 명천의 정말수도 처단되었다.[2]
  • 장덕산(장평 석령) 싸움 - 10월 말 길주 일본군이 노략질하고 돌아가는 길을 막아 크게 이겼다. 『선조수정실록』은 눈 내리는 추운 밤을 지나 600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적었다.[3]
  • 쌍포 싸움 - 12월 마천령 아래에 진을 친 일본군을 쳐서 이겼다.[3]
  • 길주 포위와 백탑 싸움 - 길주성을 에워싸 땔감과 꼴을 끊었다. 1593년 1월 가토가 남쪽으로 물러나자 길주의 일본군도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고, 의병은 백탑 들판에서 퇴각하는 적을 쳤다. 이로써 관북 지방이 회복되었다.[2]

정문부는 공을 세웠으나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사실과 다르게 보고해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전한다. 뒤에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고, 나중에 억울함이 풀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1]

1708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비문을 지어 길주 주민들과 함께 북관대첩비를 세웠다(1709년으로 적는 글도 있다). 러일 전쟁 때 함경도에 들어온 일본군이 비를 빼앗아 1905년 일본으로 실어 갔고, 비는 야스쿠니 신사 등에 놓였다.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이 그 존재를 알린 뒤 반환 요구가 이어졌고, 2005년 10월 남한으로 돌아온 비는 2006년 3월 1일 개성에서 북한에 넘겨져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4]

  1. ↑ 1.0 1.1 정문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2.2 의병의 봉기, 『신편 한국사』 29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3.0 3.1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10월 1일, 북도 평사 정문부가 길주의 적병을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4. ↑ 오은경, 「북관대첩비 반환과 남북관계」,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학술지 게재 논문,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