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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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晉州城戰鬪)는 임진왜란 중 경상도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싸움으로, 1592년 10월의 제1차 전투는 목사 김시민이 일본군을 물리친 진주 대첩이고, 1593년 6월의 제2차 전투는 성이 함락되며 군민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싸움이다.

- 병력 - 1592년 9월 말 김해에 모인 일본군이 창원·함안을 거쳐 진주로 몰려왔다. 성 안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의 군사 3,700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 명뿐이었다.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흩어진 병력을 모으고 원군을 청했다.
- 경과 -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동안 공방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대나무 사다리와 3층 누대를 앞세워 성벽을 올랐으나, 성 안에서는 현자포·진천뢰·질려포를 쏘고 돌과 끓는 물, 불붙인 짚단을 던져 막았다. 성 밖에서는 곽재우가 보낸 의병과 최경회·임계영 등의 의병이 횃불과 기습으로 적의 뒤를 흔들었다.
- 결과 - 김시민은 동문에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쓰러져 끝내 숨졌고, 이광악이 대신 지휘해 성을 지켰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경상우도 장악과 전라도 진출이 막혔다. 김시민은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일본군 규모를 백과사전은 약 2만 명으로, 우리역사넷은 3만여 명으로 적는다.
- 배경 - 명과 일본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던 1593년 6월, 경상도 남해안에 머물던 일본군이 앞선 패배를 갚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대군으로 진주를 다시 쳤다. 명군은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했고, 도원수 김명원과 권율의 관군도 물러났다.
- 경과 - 창의사 김천일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고종후, 김해 부사 이종인 등과 함께 수천 명으로 성에 들어가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버텼다. 큰비로 성벽이 무너지고 황진이 전사한 뒤, 29일 일본군이 귀갑차를 앞세워 성을 넘었다.
- 결과 - 김천일·최경회·고종후는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졌고, 성 안에 있던 6만~7만 명의 군민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관기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본군도 피해가 커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 싸움 | 때 | 지휘 |
|---|---|---|
| 진주 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 | 1592년 10월 | 김시민 |
| 한산도 대첩 | 1592년 7월 | 이순신(학익진) |
| 행주 대첩 | 1593년 2월 | 권율 |
| 사르후 전투 | 1619년 | 강홍립, 명·후금 전쟁에 파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