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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1619)는 1619년(광해군 11) 3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게 크게 진 전투로, 조선에서는 심하 전투라고도 하며 강홍립이 이끈 조선군은 부차에서 패한 뒤 후금에 항복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1618년 명의 무순을 공격하자, 명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일을 들어 조선에 출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파병을 꺼렸으나 신하들의 주장에 밀려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1만 3천여 명을 보냈다.[1] 사르후는 명의 장수 두송이 전사한 곳의 이름으로 중국에서 이 전역 전체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고, 조선에서는 심하 전역·기미년 전역이라고도 불렀다.

  • 명군의 편성 - 요동 경략 양호가 10여만 명을 서로·남로·북로·동로의 4로군으로 나누어 후금의 근거지를 치게 했다. 조선군은 유정이 이끄는 동로군에 편제되었다.
  • 명군의 패배 - 3월 1일 서로군의 두송이 사르후에서 전군을 잃고 전사했고, 3월 2일 북로군의 마림도 기습을 받아 크게 졌다.
  • 부차 패전 - 3월 4일 동로군이 부차에서 후금군에게 대패해 유정이 자결했다. 보급이 끊긴 채 강행군하던 조선군도 김응하 등의 분전에도 무너졌다.
  • 강홍립의 항복 - 강홍립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고, 조선군 수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2]

항복을 둘러싼 견해

편집 원본 편집

백과사전은 강홍립의 투항이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라고 서술한다.[1] 『광해군일기』는 강홍립이 싸우기 전에 역관을 후금 진영에 보내 조선의 출병이 본뜻이 아님을 알렸다고 적었다. 반면 우리역사넷은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선군이 9천 명에 이른 점 등을 들어 투항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항복하라는 밀지는 없었다고 보는 연구를 소개한다.[3]

후금은 이후 개원·철령을 차지하고 1621년 심양·요양을 점령해 요동을 장악했다. 명과 조선을 잇는 육로가 끊겼고, 광해군은 명의 추가 파병 요구를 거절하며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는 외교를 폈다.[2]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들어와 강화를 주선했다.[1]

  1. ↑ 1.0 1.1 1.2 강홍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2.0 2.1 심하전투,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
  3. ↑ 강홍립,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