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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와 일어난 전쟁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한 가운데 두 나라가 형제 관계를 맺는 화의로 끝났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충돌을 피하는 외교를 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서인 정권은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친명배금)을 내세웠다. 명의 장수 모문룡이 평안도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치고 후금의 뒤를 위협했고, 1624년 이괄의 난이 실패한 뒤 그 잔당이 후금으로 달아나 조선 공격을 부추겼다. 명과의 교역이 막혀 물자가 모자랐던 후금은 1627년 1월 아민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조선을 치게 했다.[1]

  • 침입 -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안주·평양을 거쳐 황해도 평산까지 내려왔다.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했다.
  • 피난 -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고, 소현 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민심을 수습했다. 김상용이 서울을 지켰다.
  • 의병 -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 의주의 이립 등이 의병을 일으켜 후금군의 뒤를 쳤다.
  • 강홍립 - 사르후 전투 뒤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이 후금군과 함께 들어와 화의를 주선했다.
  • 정묘약조 - 1627년 3월 강화도에서 화의를 맺었다. 두 나라가 형제 관계를 맺고,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되 명을 적대하지 않으며, 후금군은 곧 물러가기로 했다.
  • 국경 무역 - 이후 중강 등에서 후금과의 교역 시장(개시)이 열렸다(→ 조선 후기의 경제).
  • 갈등 심화 -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굴욕으로 여겼고, 후금은 많은 세폐와 물자를 요구했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거부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두 호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구분 정묘호란 병자호란
시기 1627년(인조 5) 1636년 12월~1637년 1월(인조 14~15)
상대 후금 청(후금이 이름을 바꿈)
왕의 피난처 강화도 남한산성(강화도는 함락)
활약한 인물 정봉수(용골산성), 이립 김준룡(광교산), 임경업(백마산성), 척화파 김상헌·삼학사
결과 형제 관계 삼전도에서 항복, 군신 관계, 소현 세자·봉림 대군이 볼모로 감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뒤 정묘호란(1627)까지 사이에는 광해군 때의 사르후 전투(1619)가 있다. 처인성 전투(1232)는 고려 몽골 전쟁, 행주 대첩(1593)은 임진왜란의 일이다.

  1. ↑ 정묘호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