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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의 천주교 신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일로 처형된 사건으로, 진산 사건 또는 신해사옥이라고도 한다.

1790년 북경에 간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상 제사를 금하는 사목 서한을 받아 와 조선 교회에 전했다. 교황청은 1742년 유교식 조상 제사를 미신으로 보아 금했는데, 이 금령이 그때 조선에 전해진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그 뒤에도 제사를 지냈으나, 진산의 양반 윤지충은 1791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웠다.[1]

  • 정치 문제로 번짐 - 남인 홍낙안 등 천주교를 공격하던 공서파가 이 일을 패륜이자 역적 행위로 몰아 엄벌을 요구하는 글을 돌렸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은 일이 크게 번져 같은 당의 이가환·정약용·이승훈이 다치지 않도록 처벌 범위를 줄이려 했다.[1]
  • 처형 -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의 조사에서 윤지충은 신주를 태워 재를 마당에 묻었다고, 권상연도 신주를 몰래 태웠다고 자백했다. 정조는 처형을 명하면서, 천주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강상 윤리를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2]
  • 후속 조치 - 진산군을 5년 동안 현으로 강등하고, 군수 신사원은 신속히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귀양 보냈다. 서학서를 갖지 못하게 하고 홍문관에 있던 서학서까지 모두 불태웠다.[1]
  • 다른 지역 - 권일신·이승훈이 붙잡혀 문초를 받았고, 서울의 중인 신자와 경기·충청도의 신자들도 잡혔으나 대부분 배교하고 풀려났다.[1]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지배층은 천주교를 부모도 임금도 모르는 '무부무군'의 가르침으로 보게 되어 이후 탄압의 논리가 굳어졌다. 양반 신자가 대거 교회를 떠나 중인 이하 신자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천주교와 함께 서양 과학 기술까지 배척하는 분위기가 퍼졌다.[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권상연을 윤지충의 외종형으로, 우리역사넷은 외제(外弟)로 적는다.[1][2]

천주교 박해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박해 때 내용
신해박해 1791년, 정조 윤지충·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처형
신유박해 1801년, 순조 이승훈·정약종 처형, 정약용 유배, 황사영 백서 사건
기해박해 1839년, 헌종 프랑스 신부 처형
병인박해 1866년, 고종 프랑스 신부 처형, 병인양요의 원인
  1. ↑ 1.0 1.1 1.2 1.3 1.4 1.5 신해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2 『정조실록』 권33, 15년 11월 7일, 전례 논쟁-진산 사건,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