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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으로,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인 첫 세례자가 되었고 귀국해 동료들과 한국 천주교회를 세웠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본관은 평창, 호는 만천이다. 외숙이 남인의 중심 인물 이가환이고, 아내가 정약용·정약전 형제의 누이여서 정약용과는 처남·매부 사이였다. 권철신의 문하에서 이벽 등 기호 남인 젊은 학자들과 어울리며 서학을 접했고, 1780년(정조 4) 진사가 되었다.[1]

세례와 교회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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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 말 동지사의 서장관이 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베이징에 갔다. 북당에서 선교사들에게 필담으로 서양 수학과 교리를 배운 뒤 1784년 초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해 봄 교리서와 십자가·묵주 등을 가지고 돌아와 이벽·권일신·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2] 한국가톨릭대사전은 1784년 겨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열린 첫 세례식을 교회 창설로 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례방 김범우의 집을 신앙 집회소로 정해 정기 모임을 가진 것을 창설로 적는다.[1][2]

  • 명례방 사건(1785) - 김범우의 집에서 모이다 형조에 적발되어 한때 교회를 떠났으나 곧 돌아왔다. 1786년에는 신자들끼리 신부를 정해 성사를 베푸는 가성직 제도를 이끌었다가,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 진산 사건(1791) - 윤지충·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일로 서양 서적을 들여온 일이 문제가 되어 평택 현감에서 물러났다. 조상 제사를 금한 베이징 주교의 지시와 유교 예속 사이에서 고민하다 교회 활동에서 멀어졌다.
  • 을묘년(1795) -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다 놓친 사건 뒤 예산으로 유배되었다.[2]

1801년 순조 즉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반대파는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을 '사학의 세 원흉'으로 지목했다. 이승훈은 2월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 이가환·정약종·홍낙민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처형 장소를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서소문 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대문 밖으로 적는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안은 아들·손자·증손까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냈다.[1][2]

천주교 박해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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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때 내용
진산 사건(신해박해) 1791(정조 15) 윤지충·권상연 처형
신유박해 1801(순조 1) 이승훈·정약종·주문모 처형, 정약용 유배, 황사영 백서 사건
기해박해 1839(헌종 5) 프랑스 신부 3명 처형, 척사윤음
병인박해 1866(고종 3) 흥선 대원군의 금압령, 병인양요의 원인
  1. ↑ 1.0 1.1 1.2 이승훈 李承薰(1756~1801),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이승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