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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규장각과 장용영을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이름은 산(祘)이다. 아버지가 임오화변으로 죽은 뒤 세손으로서 견제를 받았으나 영조 말년 대리청정을 거쳐 즉위했다. 영조의 탕평을 이어 받되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준론 탕평을 펴서 노론뿐 아니라 소론·남인(채제공 등)도 등용했다.[1]

  • 규장각(1776) -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세웠다. 역대 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는 곳에서 출발해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 기구가 되었다.
  • 초계문신제(1781) - 37세 이하의 젊은 문신을 뽑아 규장각에서 재교육하고 시험을 보게 했다.
  • 서얼 등용 - 1779년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썼다.
  • 장용영 - 1785년 국왕 호위를 맡은 장용위로 시작해 1793년 장용영이라는 독립 군영으로 키운 국왕 친위 부대이다. 도성의 내영과 수원 화성의 외영으로 나뉘었고,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1802년 없어졌다.[2]
  • 수원 화성(1794~1796) -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을 만들고, 새 도시 화성을 쌓았다. 정약용이 설계에 참여했고 거중기를 썼다.
  • 배다리와 주교사 - 정조는 현륭원에 참배하러 수원으로 행차할 때 한강에 배를 잇대어 엮은 배다리(주교)를 놓고 건넜다. 1789년 배다리 가설을 전담하는 상설 기구 주교사를 두었고, 왕이 직접 운영 방식을 정리한 『주교지남』을 지었다. 배다리에는 한강의 경강선이 동원되었다.

경제·문화 정책

편집 원본 편집
  • 신해통공(1791) - 채제공의 건의로 육의전을 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없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넓혔다.
  • 편찬 - 법전 『대전통편』(1785), 무예서 『무예도보통지』(1790, 이덕무·박제가·백동수), 외교 문서집 『동문휘고』, 왕의 일기인 『일성록』, 문집 『홍재전서』를 펴냈다.
  • 문체 반정 - 박지원 등의 새로운 문체를 바르지 못하다고 보고 고전적인 문체로 돌아가게 했다.

이웃 왕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왕
장용영, 규장각, 초계문신제, 수원 화성, 『대전통편』, 신해통공 정조
균역법, 탕평비, 이인좌의 난, 『속대전』 영조
『경국대전』 완성, 홍문관 설치 성종
백두산정계비, 환국 숙종
  1. ↑ 정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장용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