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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는 순조 즉위 직후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벽파가 남인 시파 세력을 꺾으려고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처형한 사건으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 겹쳐 탄압이 더 커졌다.

천주교는 18세기 후반 남인 학자들이 서학으로 연구하다가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퍼졌다. 정조는 바른 학문을 일으키면 사교는 저절로 사라진다며 큰 박해를 피했고, 남인 시파의 영수 채제공도 이를 묵인했다. 1799년 채제공, 1800년 정조가 잇달아 죽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1]

  • 박해령 - 1801년 1월(음력) 대왕대비가 천주교를 금하는 명을 내리고,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는 오가작통법으로 교도를 찾아냈다.
  • 처형과 유배 - 이승훈·정약종 등 초기 교회 지도자와 청에서 들어온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고, 300여 명이 순교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지었다. 천주교를 믿은 왕족(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도 사사되었다.
  • 황사영 백서 사건 -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충청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숨어, 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서양 군함과 군대를 보내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내용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황사영은 처형되었고, 천주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종교로 몰려 탄압이 더 심해졌다.
  • 남인 시파 세력이 크게 꺾였고, 이후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로 이어졌다.
  • 지식인 중심이던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살아남은 교도들이 산간으로 숨어들어 신앙이 오히려 서민층으로 퍼졌다.

천주교 박해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박해 때 내용
신해박해 1791년 정조 윤지충이 어머니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른 일(진산 사건)
신유박해 1801년 순조 이승훈·정약종·주문모 처형, 정약용 유배, 황사영 백서 사건
기해박해 1839년 헌종 프랑스 신부 3명 처형, 척사윤음 반포
병오박해 1846년 헌종 첫 한국인 신부 김대건 처형
병인박해 1866년 고종 흥선 대원군 때 프랑스 선교사 9명 처형, 병인양요의 원인
  1. ↑ 신유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