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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圓光, 550년 무렵~?)은 신라 진평왕 때의 승려로,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 5계를 주고 608년 왕명으로 수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를 지었다.

진흥왕 때인 575년 무렵 25세의 나이로 중국 남조의 진(陳)에 유학해 금릉(지금의 난징)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성실론』·『열반경』을 익혔고,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수의 장안으로 가서 『섭대승론』 해석으로 이름을 떨쳤다. 600년(진평왕 22) 신라로 돌아왔다. 원광 이후 중국으로 유학하는 승려가 줄을 이었다.[1]

  • 세속 5계 - 청도 가슬갑사에 머물 때 찾아온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에서 지킬 다섯 계율을 주었다. 사군이충(충성으로 임금을 섬김), 사친이효(효도로 부모를 섬김), 교우이신(믿음으로 벗을 사귐), 임전무퇴(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음), 살생유택(생명을 가려서 죽임)이다. 화랑도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본다.
  • 걸사표 - 고구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던 진평왕은 608년(진평왕 30) 원광에게 수에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짓게 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해치는 것은 승려의 도리가 아니지만 왕의 땅에서 살고 있으니 명을 따르겠다며 글을 지었다. 이후 신라의 공식 외교 문서를 도맡았다. 수 양제는 612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으나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크게 졌다.
  • 점찰법회 - 나무패를 던져 전생의 업과 현재의 길흉을 알아보고 참회하게 하는 법회를 열어 지방민에게 불교를 퍼뜨렸다.
  • 백고좌회 - 613년 수의 사신이 왔을 때 황룡사에서 열린 인왕 백고좌 법회에서 으뜸 자리를 맡았다. 진평왕은 늙은 원광이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드나들게 할 만큼 높였다.

신라의 외교 문서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글 지은이 때
걸사표 (수에 군사를 청함) 원광 608년 진평왕
청방인문표 (당에 갇힌 김인문을 풀어 달라고 청함) 강수 문무왕
토황소격문 (당에서 황소의 난을 꾸짖음) 최치원 881년 무렵
시무 10여 조 (진성여왕에게 개혁 건의) 최치원 894년
화왕계 (신문왕에게 바른 정치를 조언) 설총 신문왕
  1. ↑ 원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