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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하대의 6두품 학자이자 문장가로,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렸다.

자는 고운·해운이다. 경주 최씨로 대표적인 6두품 집안 출신이다.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뛰어나도 아찬 이상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6두품 자제가 당에 유학해 학문으로 길을 찾았다.[1]

  • 당 유학 - 868년(경문왕 8) 12세에 당으로 건너가 국자감에서 공부했고, 874년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했다. 율수현위를 지냈다.
  • 토황소격문 - 879년 무렵 황소의 난을 진압하던 회남절도사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꾸짖는 「토황소격문」(「격황소서」라고도 한다)을 지었다. 이 글로 당에 문명을 떨쳤다.
  • 귀국(885) - 헌강왕 때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 등 왕의 문서를 맡는 자리에 있었다. 이듬해 당에서 지은 글을 모은 『계원필경』을 왕에게 바쳤다.
  • 지방관 - 진골 귀족의 견제를 받아 대산군(태인)·천령군(함양)·부성군(서산) 등의 태수로 나갔다.
  • 시무 10여 조(894) - 진성여왕에게 나라를 바로잡을 개혁안 10여 조를 올렸다. 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를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인 아찬으로 삼았으나, 진골 귀족의 반대로 개혁은 실행되지 못했다.
  • 은둔 - 이후 벼슬을 버리고 경주 남산·지리산 쌍계사·합천 가야산 해인사 등을 떠돌다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 『계원필경』 - 당에서 지은 글을 모은 문집으로, 지금 전하는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 「사불허북국거상표」 - 897년 발해가 신라보다 윗자리를 요구한 것을 당이 거절하자 신라 왕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올린 표문이다(→ 쟁장 사건).
  • 사산 비명 - 쌍계사 진감선사비 등 네 곳의 승려 비문이다.
  • 「난랑비서」 - 화랑 난랑의 비문 서문으로, 신라 고유의 도인 풍류가 유·불·도 3교를 아우른다고 했다.
  • 『제왕연대력』 - 신라 왕의 연대기로, 전하지 않는다.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우면서도 불교·도교를 아울렀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봉해지고 문묘에 모셔졌다.

신라의 문장가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빈공과 급제, 토황소격문, 시무 10여 조, 『계원필경』 최치원
수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 세속 5계 원광
청방인문표 등 삼국 통일기의 외교 문서 강수
이두 정리, 화왕계 설총
『화랑세기』·『고승전』 김대문
  1. ↑ 최치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