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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왕권을 뒷받침하려고 국왕 호위 부대인 장용위를 키워 만든 친위 군영으로, 1793년(정조 17) 서울의 내영과 수원 화성의 외영 체제를 갖추었고 정조가 죽은 뒤 1802년(순조 2) 폐지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 척신 세력의 위협 속에서 궁궐 숙위를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5군영이 각 붕당과 대신의 사병처럼 되는 폐단도 문제였다. 1782년(정조 6) 무예 출신 30명을 뽑아 번갈아 국왕을 지키게 했고, 1785년(정조 9) 이를 장용위라는 부대로 공식화했다. 장용위는 1787년 무렵 50명으로 늘어 장용청이 되었고, 이듬해 장용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93년 수원을 유수부로 높여 화성으로 부르면서 서울의 본영은 내영, 수원의 부대는 외영이 되어 하나의 큰 군영으로 완성되었다.[1][2]

  • 내영 - 한성부에 두었고, 지휘관은 장용사(장용영 대장)이다. 규모를 5사 25초로 늘려 계획했다.
  • 외영 - 수원 화성에 두었다. 수원 유수가 장용외사와 행궁 정리사를 겸했다.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과 화성 행궁을 지키는 곳이어서 실제로는 내영보다 중시되었다. 행궁을 교대로 지키는 입방군 20초와, 유사시 인근 고을에서 와서 성을 돕는 협수군 22초로 이루어졌으며, 1798년 조선 초기의 5위 체제를 본떠 다시 편성되었다.
  • 재정 - 운영비는 왕실 경비에서 나왔지만,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 등 다른 군영의 군사와 재정을 옮겨 와 키웠다. 그만큼 5군영의 규모는 줄어, 군사권을 국왕 아래로 모으는 효과가 있었다.[2]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 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정책을 뒤집었고, 장용영은 1802년 폐지되었다.

정조의 정책과 함께 보기

편집 원본 편집
정책·기구 내용
장용영 국왕 친위 군영, 서울 내영·화성 외영
규장각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 연구 기관, 서얼 검서관 등용
초계문신제 젊은 문신을 재교육
수원 화성 정약용이 설계에 참여, 거중기 사용
『대전통편』·『무예도보통지』 법전 정비, 무예 교범 편찬

조선 후기의 다른 군영인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설치되었다(→ 훈련도감).

  1. ↑ 장용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2.0 2.1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신편 한국사』 32,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