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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訓鍊都監, 1593~1882)은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어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을 길러 낸 조선 후기의 중앙 군영으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으로 이루어진 상비군이었다.

조선 전기의 중앙군인 5위는 양인 농민이 번갈아 올라와 복무하는 의무병 체제였는데, 16세기에는 군역 대신 베(군포)를 내는 일이 퍼지면서 이름만 남은 상태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지자, 새로운 전술에 맞는 군대가 필요해졌다. 1593년(선조 26) 한양을 되찾은 뒤 명나라 장수에게 화포 다루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을 바탕으로 8월에 훈련도감을 세웠고, 10월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군사를 모집해 정예병을 기르면서 굶주린 백성도 구제하게 했다. 명 척계광의 병서 『기효신서』의 훈련법과 편제를 받아들였다.[1]

  • 삼수병 - 조총을 쏘는 포수, 창·칼을 쓰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로 나누어 편성했다. 뒤로 갈수록 조총의 비중이 커져 포수가 주력이 되었다.
  • 급료병 - 군사는 한 달에 쌀 여섯 말 안팎의 급료를 받고 교대 없이 근무했다. 번갈아 복무하던 양인 의무병과 성격이 완전히 달랐으며, 서울과 그 근처에 사는 사람이 주로 들어왔다.
  • 삼수미 - 1602년부터 경비를 마련하려고 삼수미라는 세를 따로 거두었다. 17세기 이후에는 군사를 뒷받침하는 보인에게서 베나 쌀을 거두어 재정을 보탰다.
  • 편제 - 영-사-초-기-대-오로 이어지는 속오법 편제를 썼다. 이 편제는 뒤에 세운 다른 군영에도 그대로 쓰였다.
  • 지휘 - 도제조는 정승이 겸하고, 실제 지휘는 훈련대장이 맡았다. 훈련대장은 중앙 군영 가운데 가장 큰 병력을 거느린 무관의 으뜸 자리였다.

5군영 체제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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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아 국왕 호위와 도성 방어를 맡으며 5위의 기능을 대신했다. 이후 인조 때 어영청(1623)·총융청(1624, 이괄의 난 계기)·수어청(1626, 남한산성), 숙종 때 금위영(1682)이 더해져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 가운데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 도성을 지키는 핵심이었고,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 바깥을 맡았다. 1746년(영조 22) 『속대전』에 상설 기구로 실렸다.[2]

1881년(고종 18)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만들어지고 5군영이 무위영·장어영으로 통합되면서, 훈련도감은 이듬해인 1882년 폐지되었다. 이때 일자리를 잃은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임오군란으로 이어졌다.

다른 군사 조직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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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조직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설치,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 급료를 받는 상비군 훈련도감
응양군·용호군으로 이루어진 국왕 친위 부대 고려의 2군 (→ 고려의 군사 제도)
좌별초·우별초·신의군으로 조직, 몽골에 끝까지 항쟁 삼별초
병마절도사가 이끄는 병영에 소속된 각 도의 육군 조선 전기의 지방군
『무예도보통지』를 교범으로 삼은 정조의 친위 군영 장용영 (→ 정조 (조선))
양반부터 노비까지 묶은 임진왜란 이후의 지방군 속오군
  • 장용영 - 1793년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세운 군영으로, 도성의 내영과 수원 화성의 외영으로 나뉘었다. 정조가 죽은 뒤 1802년 혁파되었다.
  1. ↑ 훈련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오군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