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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에서 넘어옴)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1920)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무렵까지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만주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싸워 크게 이긴 전투로,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한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진 일제는 훈춘 사건을 꾸며 대규모 병력을 간도에 보냈다. 근거지를 백두산 쪽으로 옮기던 북로 군정서는 10월 청산리에 이르러 이도구의 홍범도 부대와 대책을 논의했다. 10월 19일 회의에서는 싸움을 피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으나, 일본군이 이미 가까이 와 있어 추격을 따돌릴 수 없게 되자 김좌진 부대는 맞서 싸우기로 했다.[1]

  • 백운평 전투(10.21) - 김좌진·이범석 부대가 청산리 골짜기 양쪽에 매복해 일본군 추격대를 전멸시키고, 이어 온 본대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첫 싸움터가 청산리에 속해 이후의 전투가 모두 청산리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 완루구 전투(10.21~22) - 홍범도 부대가 포위를 빠져나오며 일본군 부대끼리 서로 공격하게 만들어 큰 피해를 입혔다.
  • 천수평 전투(10.22) -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 기병 중대를 기습해 전멸시켰다.
  • 어랑촌 전투(10.22) -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함께 일본군 대부대에 맞선 가장 큰 싸움이었다.
  • 고동하 전투(10.25~26) - 밤에 기습을 받았으나 곧 역습해 일본군을 물리친 뒤 안도현 쪽으로 이동했다.[1]

북로 군정서군은 사관 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 홍범도의 연합 부대는 약 1,400명이었다.[1] 일본군 피해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연대장을 포함해 1,257명을 죽였다고 했고, 『독립신문』은 1,200여 명, 박은식은 2,000여 명, 이범석의 회고는 사상자 3,300명으로 전한다. 일본 측 보고는 피해를 줄여 적었다. 독립군의 인적 손실은 약 350명 안팎으로 추산된다.[2]

독립 전쟁 사상 가장 큰 승리였으나, 일제는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다(간도 참변). 독립군은 밀산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만들고 러시아 자유시로 옮겼다가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1920년대 독립군 전투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전투 때 중심 부대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청산리 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홍범도 부대
쌍성보·대전자령 전투 1932~1933년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
영릉가·흥경성 전투 1932~1933년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
  1. ↑ 1.0 1.1 1.2 청산리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5) 청산리대첩의 전과와 의의, 『신편 한국사』 48,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