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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도정치(霸道政治)는 인의(仁義)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공리(功利)만을 꾀하여 다스리는 정치를 뜻하는 한자성어이다. 어진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맞서는 말이다.[1] ‘覇道政治’로도 적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네 글자 표제어가 없고, ‘패도(霸道)’를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써 공리만을 꾀하는 일”로 풀이하며 ‘왕도’와 짝을 짓는다.[1] 패도정치는 이 패도로 하는 정치라는 뜻이다. 유교 정치사상을 설명할 때 왕도정치의 반대 개념으로 쓰고, 오늘날에는 대화나 설득보다 힘과 압박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통치나 경영 방식을 비판하는 말로도 쓴다.

‘霸(패)’는 본래 춘추 시대에 주나라 왕실을 대신해 제후들을 이끈 우두머리, 곧 ‘패자(霸者)’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覇’는 그 속자로, 일본에서는 ‘覇道(はどう)’로 적는다. 일본어 사전은 패도를 “유교에서 덕치주의에 의한 왕도에 맞서, 무력과 권모로 하는 지배·통치 방식”으로 풀이하고, 왕도와 패도를 뚜렷이 갈라 말한 사람으로 맹자를 든다.[2]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霸 패 으뜸, 패자 힘으로 제후의 우두머리가 됨
道 도 길, 도리 방법, 도리
政 정 정사, 다스리다 다스림
治 치 다스리다 다스림

맹자의 왕패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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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패도를 맞세운 것은 맹자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以力假仁者霸,霸必有大國;以德行仁者王,王不待大,湯以七十里,文王以百里。以力服人者,非心服也,力不贍也;以德服人者,中心悅而誠服也,如七十子之服孔子也。

[3]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자는 패자이니 패자는 반드시 큰 나라를 가져야 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는 자는 왕자이니 왕자는 나라가 클 필요가 없어, 탕왕은 70리, 문왕은 100리의 땅으로 일어났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모자라서 복종하는 것이고,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면 속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니,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한 것과 같다.” 패자는 겉으로는 인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힘에 기대어 남을 복종시킨다는 것이다. 맹자의 왕도 사상은 왕도정치 문서에서 자세히 다룬다.

‘패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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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霸道’라는 두 글자는 《사기(史記)》 권68 〈상군열전(商君列傳)〉에 뚜렷이 보인다. 위나라 출신의 위앙(衛鞅, 뒤의 상앙)은 진(秦)나라 효공(孝公)을 세 번 만나 차례로 제도(帝道), 왕도(王道), 패도를 말했는데, 앞의 두 번은 효공이 졸거나 흥미를 보이지 않다가 세 번째에야 귀를 기울였다.

鞅曰:「吾說公以霸道,其意欲用之矣。誠復見我,我知之矣。」

[4]

“내가 공에게 패도를 말했더니 그것을 쓰려는 뜻이 있었다. 다시 나를 만나 준다면 나는 그 뜻을 알겠다.” 위앙은 뒤에 “제왕의 도로 삼대(하·은·주)에 견주자고 했더니 임금께서 너무 멀어 기다릴 수 없다고 하시기에 나라를 강하게 하는 술수(彊國之術)로 설득했다”고 털어놓았다.[4] 위앙은 이후 변법으로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고, 법가의 부국강병책은 패도의 대표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나라 선제(宣帝)는 유학을 좋아하던 태자(뒤의 원제)가 형벌을 너무 엄하게 쓴다고 간하자 “한나라에는 본래 제도가 있어, 패도와 왕도를 섞어 쓴다(漢家自有制度,本以霸王道雜之)”고 꾸짖었다.[5] 현실 정치에서는 왕도와 패도를 함께 쓴다는 이 말은 뒷날 유학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네 글자 ‘패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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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한문에서는 ‘霸道’, ‘霸者’ 등으로 말했고, ‘霸道政治’라는 네 글자는 근대에 생긴 말이다. 중국 고전 원문과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이 네 글자가 없다.[6] 일본에서는 1916년 우자와 후사아키(鵜沢総明)의 논집에 “패도정치의 기본은 민심에 있다(覇道政治の基本は民心に在り)”는 대목이 보이고,[7] 1920년대에는 막부의 무가 정치를 ‘패도정치’로, 메이지 유신을 ‘왕정복고’로 대비하는 수신서의 설명에도 쓰였다.[8] 비슷한 시기에 ‘王道政治’도 함께 쓰이기 시작했다(왕도정치 참고).

  • 1932년 만주국 건국 무렵에는 ‘왕도’가 건국 이념으로 내세워지면서, 이전 군벌의 통치를 ‘패도정치’라 부르는 선전 문구가 쓰였다. 일본 육군성 조사반이 펴낸 자료는 “선린 일본의 궐기를 만나 패도정치의 악마는 홀연히 멸망했다. 지금이야말로 … 왕도정치 확립의 때”라고 적었다.[9]
  • 쑨원(孫文)은 1924년 강연 〈민족주의〉 제1강에서 “무력은 패도이니, 패도로 이룬 단체가 곧 국가”라며 왕도로 이룬 민족과 대비했다. 이 강연은 1932년 《동광》에 우리말로 옮겨 실렸다.[10]
  • 협력사를 단가 인하 압박으로만 다루는 패도정치식 공급망 관리는 결국 보안 사고 때 아무도 먼저 알려 주지 않는 관계를 만든다.
  • 그 왕은 주변국을 힘으로 굴복시켰지만, 패도정치의 한계로 그가 죽자 동맹은 곧바로 무너졌다.
  • 맹자는 패도정치를 비판하며 덕으로 백성의 마음을 얻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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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도정치(王道政治):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 패도정치의 반대말.
  • 패도(霸道): 인의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써 공리만을 꾀하는 일.[1]
  • 부국강병(富國強兵):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함. 패도를 내세운 법가가 추구한 목표.
  1. ↑ 1.0 1.1 1.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패도”,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D%8C%A8%EB%8F%84, 확인날짜=2026-10-12.
  2. ↑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개정신판 세계대백과사전(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覇道”,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A6%87%E9%81%93, 확인날짜=2026-10-12.
  3.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4. ↑ 4.0 4.1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68 〈상군열전(商君列傳)〉.
  5. ↑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9 〈원제기(元帝紀)〉.
  6.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霸道政治”·“覇道政治”(0건), https://sillok.history.go.kr/;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고전원문 검색 “覇道政治”(0건),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12.
  7. ↑ 鵜沢総明, 《偆湫論集》, 春秋社, 1916,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952476, 확인날짜=2026-10-12.
  8. ↑ 井上哲次郎·深作安文, 《新撰中等修身書備考》, 1926,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909839, 확인날짜=2026-10-12.
  9. ↑ 陸軍省調査班 편, 《満洲国成立の経緯と其国家機構に就て》, 1932,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1146597, 확인날짜=2026-10-12.
  10.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손문(孫文) 원저, “完譯 三民主義(1), 民族主義 第1講”, 《동광》 제39호, 1932년 11월 1일, https://db.history.go.kr/id/ma_014_0380_0240, 확인날짜=2026-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