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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청동기 문화가 들어오는 기원전 2000~1500년 무렵까지, 한반도에서 간석기와 토기를 쓰고 정착 생활과 초기 농경을 시작한 시기이다.

신석기 시대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흙을 빚어 구운 토기로 구별된다. 기후가 따뜻해져 지금과 비슷한 환경이 되자 사람들은 바닷가와 강가에 자리를 잡고 물고기와 조개를 잡으며 한곳에 머물러 살기 시작했다. 후기로 가면서 조·피·기장 같은 잡곡을 기르는 농경이 시작되었다.[1]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냥·채집·고기잡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내내 어로와 채집이 중요한 식량원이었고, 농경은 이를 보완하는 수준에서 점차 비중을 넓혔다.

  • 이른 민무늬 토기·덧무늬 토기: 신석기 이른 시기의 토기. 제주 고산리,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등에서 나왔다.
  • 빗살무늬 토기: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글고, 겉면에 빗 모양 도구로 짧은 선을 새겼다. 강가나 바닷가의 모래땅에 꽂아 세우고 곡식을 저장하거나 음식을 익히는 데 썼다. 서울 암사동, 김해 수가리, 봉산 지탑리 등에서 나왔다.

토기가 생기면서 음식을 끓여 먹고 남은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에는 저장용 그릇이 없었다.

  • 움집: 땅을 둥글게 또는 모서리를 둥근 네모꼴로 파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덮은 집. 가운데에 화덕을 두었고, 저장 구덩이를 화덕 옆이나 출입문 쪽에 두었다.
  • 농경: 돌괭이·돌보습·돌낫으로 땅을 일구고 거두었다. 봉산 지탑리, 평양 남경 유적에서 탄화된 좁쌀이 나왔다.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본격화된다.
  • 옷과 실: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이나 그물을 지었다.
  • 사회: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사회였다.
  • 신앙: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특정 동식물을 부족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토테미즘, 무당이 영혼과 하늘을 잇는다고 믿는 샤머니즘,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다. 조개껍데기 가면, 흙으로 빚은 얼굴 등 예술품도 남았다.
유적 내용
서울 암사동 한강가의 대표적인 움집 마을.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다.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 조개껍데기 가면과 일본 규슈산 흑요석이 나와 바다 건너 교류를 보여 준다.
양양 오산리 이른 시기의 덧무늬 토기와 흙으로 빚은 얼굴이 나왔다.
봉산 지탑리 탄화된 좁쌀이 나와 농경의 근거가 되었다.
제주 고산리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가 나온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구석기·청동기 시대와의 비교

편집 원본 편집
모습 시대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 살며 옮겨 다님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찍개 등 뗀석기만 씀 구석기 시대
반달 돌칼로 벼 이삭을 거둠 청동기 시대
비파형 동검·고인돌, 계급과 군장의 등장 청동기 시대
  1. ↑ 신석기시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