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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後市)는 조선 후기 국가가 공식으로 열어 감독한 국경 무역 시장인 개시(開市)와 달리, 상인들이 사신 왕래 등을 틈타 사사로이 벌인 무역으로, 압록강 중강의 중강 후시와 청 국경 관문인 책문의 책문 후시가 대표적이다.

조선은 국경 무역을 원칙적으로 정부가 정한 시기와 장소, 물품에 한해 허용했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압록강의 중강에 처음 시장을 연 중강 개시가 그런 공식 무역이었다. 그러나 금령이 느슨해지자 사상(私商)들이 몰래 따라가 마음대로 교역했고, 이렇게 공식 시장 밖에서 벌어진 사무역을 후시라 불렀다.[1]

  • 중강 후시 - 1646년(인조 24) 청의 요구로 중강 개시가 다시 열린 뒤, 황해도·평안도와 서울 상인들이 개시의 틈을 타 중국 상인과 거래했다. 개시는 1년에 두 번 날짜를 정해 열렸지만 후시는 수시로 이루어졌다. 『만기요람』은 1700년(숙종 26) 청 예부에 요청해 중강 후시를 없앴다고 적는데, 『동문휘고』에 따라 그 시기를 1701년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2]
  • 책문 후시 - 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사신이 오갈 때 따라간 상인들이 벌인 무역이다. 의주의 만상과 개성의 송상이 은과 인삼을 몰래 가지고 인부와 말 사이에 섞여 들어가 거래했다. 중강 후시가 사라진 뒤에도 책문 후시는 계속되어 가장 큰 대청 무역 통로가 되었다.[1] 정부는 금지와 허용을 거듭하다가 1754년(영조 30) 만상에게만 수량을 정해 허락했다(만상 후시).[3]
  • 왜관 후시 - 동래 초량 왜관에서도 정해진 개시 날 외에 동래 상인(내상)과 일본 상인 사이의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은 은·인삼·종이·가죽 등을 내보내고, 청에서 비단·약재·문방구·서적 등을 들여왔다. 금지 품목인 가죽이나 인삼을 몰래 거래하는 일이 잦아 조정에서 거듭 단속을 논의했다. 상인들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며 큰 이익을 남겼고, 이를 통해 대상인이 자라났다.

개시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구분 개시 후시
성격 정부가 열고 감독하는 공무역 상인들의 사무역(밀무역 포함)
때 정해진 날(중강은 연 2회) 사신 왕래 등 수시
예 중강 개시, 회령·경원 개시, 왜관 개시 중강 후시, 책문 후시, 왜관 후시
주요 상인 관에서 정한 상인 만상, 송상, 내상
  1. ↑ 1.0 1.1 개시와 후시, 사료로 본 한국사(『만기요람』 재용편5 중강개시·책문후시),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8 확인.
  2. ↑ 중강후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8 확인.
  3. ↑ 만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