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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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 1907~1908)은 정미의병 때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결성한 연합 의병 부대로,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벌였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 제국 군대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원주에서 관동 의병을 이끌던 이인영은 각 도의 의병에게 격문을 보내 양주로 모이게 했다. 모인 의병은 13도 창의대진소를 차리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총병력은 1만 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해산 군인이 3,000명이었다. 결성 시기를 백과사전은 1907년 11월로, 『대한매일신보』의 이인영 약사는 12월 무렵으로 전한다.[1][2]
- 편성 - 처음에는 호서 이강년, 교남 신돌석, 진동 허위, 관동 민긍호, 관서 방인관, 관북 정봉준, 전라 문태수를 각 도의 창의대장으로 두었다. 뒤에 개편하면서 지휘부가 모두 양반 유생으로 채워져, 신돌석과 홍범도 같은 평민 의병장이 빠졌다.
- 교전 단체 인정 요구 -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알리고,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1908년 1월 허위가 이끈 선발대 300명이 동대문 밖 30리까지 나아가 본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각 부대의 집결이 늦어지는 사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몇 시간 싸우다 물러났다.[2] 같은 달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지휘를 허위에게 맡긴 채 문경으로 돌아갔다. 허위가 다시 서울을 치려 했으나 화력이 모자라고 각 부대가 따로 공격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고, 13도 창의군은 흩어져 각자 연고지에서 싸움을 이어 갔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일본군에 붙잡혀 그해 9월 순국했다.[1]
전국의 의병이 처음으로 하나의 지휘 아래 모인 연합 부대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