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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운동(抗日義兵運動)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서 시작해 1910년 무렵까지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 등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인 운동으로,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의 세 시기로 나뉜다.

의병은 나라가 위급할 때 스스로 일어난 민간의 군대이다. 한말의 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을 지닌 유생이 이끌며 시작했으나, 침략이 깊어질수록 평민 의병장이 늘고 해산 군인이 가세해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국내에서 밀려난 뒤에는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의 바탕이 되었다.[1]

을미의병 (1895~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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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기 - 을미사변(왕후 시해)과 단발령 등 을미개혁.
  • 주도 - 유인석(제천)·이소응(춘천) 등 지방 유생. 친일 관리를 처단하고 관군·일본군과 싸웠다.
  • 해산 -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진 뒤 새 정부가 단발령을 철회하고, 고종이 의병 해산을 권하는 조칙을 내리자 대부분 해산했다. 일부는 활빈당으로 이어졌다.[2]

을사의병 (1905~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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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기 - 러일 전쟁 이후 침략과 을사늑약.
  • 주요 의병장 - 전 참판 민종식이 홍주성을 점령했고, 최익현은 태인에서 일어났다가 붙잡혀 쓰시마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평민 출신 신돌석이 경북·강원 일대에서 활약했다.

정미의병 (1907~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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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기 -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한 고종 강제 퇴위, 한일 신협약, 대한 제국 군대 해산.
  • 성격 - 해산 군인이 합류해 무기와 전술이 나아졌고, 농민·상인·노동자 등 여러 계층이 참여했다. 평민·천민 출신 의병장도 많이 나왔다.[3]
  • 13도 창의군 - 1907년 12월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전국 의병이 연합했다.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 서울 진공 작전(1908.1) - 허위가 이끈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으나 후속 부대가 늦고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물러나 실패했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 - 일본군이 호남 의병을 집중 공격했다. 이후 의병은 만주·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으로 이어졌다.
  • 친일 세력의 탄압 - 일진회는 자위단을 만들어 의병 진압을 도왔다.

세 시기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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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계기 특징
을미의병 을미사변, 단발령 유생 중심, 아관파천 뒤 단발령 철회·해산 권고로 해산
을사의병 을사늑약 민종식·최익현, 평민 의병장 신돌석
정미의병 고종 퇴위, 군대 해산 해산 군인 합류, 13도 창의군·서울 진공 작전
  1. ↑ 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을미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3. ↑ 정미의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