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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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관련된 신하들을 찾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으로, 훈구 대신과 사림이 함께 큰 화를 입었다.
성종의 왕비 윤씨는 1479년 폐위되고 1482년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즉위 뒤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의 사당에 함께 모시려 했고, 이를 반대한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 갔다. 이어 폐위와 사사를 주장하거나 지켜보기만 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죄를 물었다.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김굉필 등 10여 명이 사형되고, 이미 죽은 한명회·정창손·한치형·정여창·남효온 등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가족과 친족까지 연좌되어 피해 범위와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와 비교할 수 없었다.[1]
- 재정 문제 - 사치와 향락으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연산군은 공신에게 준 공신전과 노비까지 거두려 했고, 이에 대신들이 반발하며 왕의 낭비를 막으려 했다.
- 궁중과 부중의 대립 - 왕을 부추기는 궁중 세력(임사홍, 왕비의 오빠 신수근 등)과 왕을 견제하는 부중(조정) 세력이 갈라졌다. 무오사화 때 원한을 품은 임사홍이 연산군의 복수심을 이용해 옥사를 꾸몄다고 본다.[1]
- 능상 - 1503년 양로연에서 이세좌가 왕의 옷에 술을 엎지른 일, 홍귀달이 손녀를 궁에 들이라는 명을 따르지 않은 일 등 왕을 업신여겼다고 본 사건들이 겹쳤다.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폐비 논의에 참여한 자와 추숭을 반대한 자를 모두 중형에 처해, 죽은 자는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족속을 연좌했다고 적었다. 이후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 언로를 막고 금표를 세워 사냥터를 넓히는 등 폭정이 더 심해졌고, 이는 1506년 중종반정의 원인이 되었다.[2]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은 기록마다 다르다. 백과사전 연산군 항목은 즉위 직후인 1495년에 이미 알았다고 보며, 1504년 임사홍이 처음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널리 퍼진 것이다.
- ↑ 1.0 1.1 갑자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9월 2일,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