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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 외척인 소윤(윤원형 일파)이 대윤(윤임 일파)과 그에 가까운 사림을 몰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중종의 첫 계비 장경 왕후 윤씨는 세자(인종)를 낳고 죽었고, 둘째 계비 문정 왕후 윤씨는 경원대군(명종)을 낳았다. 세자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대윤, 문정 왕후의 동생 윤원로·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 불렀는데, 두 세력은 세자 자리를 두고 맞섰고 조정과 사림도 갈라졌다.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해 유관·이언적 등 사림이 다시 등용되었으나, 인종은 8개월 만에 죽었다. 열두 살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권력은 소윤에게 넘어갔다.[1]

1545년 8월 병조 판서 이기, 지중추부사 정순붕, 공조 판서 허자, 호조 판서 임백령 등이 나라에 큰일이 있다며 대신들을 모으기를 청했고, 문정 왕후(왕대비)가 이언적 등과 윤임·유관·유인숙의 일을 논의해 죄를 정했다.[2] 윤임·유관·유인숙은 역모를 꾀했다는 죄로 사사되었고 그들과 가까운 사림이 화를 입었다.

  • 양재역 벽서 사건(1547) - 문정 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 등을 비난하는 벽서가 양재역에 붙자, 이를 빌미로 봉성군·송인수 등을 죽이고 이언적·노수신·유희춘 등 20여 명을 귀양 보냈다(정미사화).
  • 을사사화 이후 5~6년 동안 죽은 이름난 선비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1565년 문정 왕후가 죽자 윤원형이 몰락하고, 귀양 갔던 사림이 돌아와 선조 때 사림 중심의 정치가 열렸다. 이것이 뒤의 붕당으로 이어졌다(→ 동서 분당).
  • 사화를 피해 고향에 물러난 사림은 학문 연구와 서원 건립에 힘써 성리학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 서원, 이황).[1]

사화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화 때 발단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김종직의 「조의제문」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폐비 윤씨 사사 사건
기묘사화 1519년(중종) 조광조의 위훈 삭제 주장
을사사화 1545년(명종) 외척 대윤과 소윤의 다툼, 윤임 제거
  1. ↑ 1.0 1.1 을사사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8월 22일, 왕대비가 이언적 등과 윤임·유관·유인숙의 일을 논하고 죄를 정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